미술관으로 향했던 나를 추억하다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문 닫기 한 시간 전 급한 마음에 지하철을 탔다. 조용한 전시실 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전시회 마지막 날이다. 작품은 발소리조차 미안해질 만큼 절대 고요로 맞이했다.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한국계 화가, 아시아의 피카소로 불리는 신순남의 ‘진혼제’ 전시회였다.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처음 미술관을 경험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제주시 내 피부과 건물 지하에 있는 작은 갤러리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어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는 것과 조용한 분위기가 가져오는 어색함이었다.
오랜만에 미술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설렜다. 오늘의 주인공은 피카소다. 정읍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피카소와 동시대 화가’ 특별전을 찾았다. 이 미술관은 2년 전, ‘100년의 기다림–한국근대명화전’을 관람하기 위해 처음 방문했다. 박수근의 ‘소금장수’를 마주하고 뭉클했던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미술책이나 잡지 등에서 종종 봤던 작품이지만 원화를 현장에서 만나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진짜 같은 조화에 빠져 지내다 향기 나는 꽃 한 다발을 선물 받아 예쁜 화병에 꽂은 기분이었다.
피카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면서 입체파의 대표 주자로 스페인 출신이라는 정도다. 여기에 그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등에 대해선 미술수업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역만리, 전라도 한 미술관에서 피카소를 만난다는 사실이 흥분됐다. 10시부터 문을 여는 미술관은 일찍이라 한산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유로 한 시간 간격으로 관람객을 맞이했다. 11시에 감상하기로 했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빛나는 은접시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아틀리에의 모델’이 유화작품으로는 유일한 듯했다. 주를 이루는 건 그의 판화작품이었다. 잘 알려진 ‘알제의 여인들’의 판화 본과 동물, 투우, 얼굴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그의 작품세계가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회에는 얼굴 표정에 관심 깊던 그의 면모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은접시에 표현한 얼굴에는 독특함과 익살스러움이 묻어났다. 여기에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부엉이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에도 눈이 갔다. 그는 도자기와 접시 그림에 여러 형태의 부엉이를 선보였다. 그가 접시에 채색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역시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알았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드레 빌레르가 담은 피카소는 에너지 넘치는 건강한 화가, 나이 들었지만 강한 눈빛으로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벽이라 해도 무방할 캔버스 앞에서 윗옷을 벗고 작업하는 그의 뒷모습은 강렬했다. 아내 자클린과 함께 하거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인간 피카소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피카소와 함께 했던 동시대의 화가들 작품 역시 흥미로웠다. 브라크와 마리 로랑생,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와 호안 미로 등은 익숙한 느낌으로 편안히 다가왔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샤갈이야. 난 지금 믿기지 않는데, 내가 샤갈 작품 앞에 있다니 말이야.”
큰아이는 샤갈의 ‘파리 하늘의 두 남녀’ ‘농부’ 등을 감상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책 속 이미지로 만났던 거장의 작품을 앞에 두고 가슴이 벅찼던 모양이다. 샤갈이 전하는 묘한 색의 분위기는 순간 긴장시키면서 몇 번이고 그림을 보게 했다.
어느 작가의 전시회를 보러 가는 건 마치 셀렘을 갖고 소개팅에 나서는 20대의 마음 같다. 그동안 마음에 두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작품이라면 감정의 파고는 더욱 강하고 쉼 없이 이어진다. 피카소가 그러했다. 이름만으로도 압도되어 버리는 예술가, 그를 정읍의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은 축복이었다. 접시와 도자기, 석판화 등 그동안 몰랐던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보면서 그에게는 주변의 모든 게 캔버스가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십여 년 전 은행잎 날리는 덕수궁미술관에서 화가 류경채의 절정의 가을을 봤던 감동처럼 오늘이 오래 기억될 듯하다. 전시회를 볼 때마다 예술가의 삶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작품 앞에 서는 순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날 때는 그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평면 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잡념들을 잠시 도망가게 한다. 작가의 그림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붓끝으로 채워진다. 그 속에는 생각하는 것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끈기와 상상력, 열정이 담겼다.
그림을 봤다고 일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현실은 제자리걸음이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머리가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미술관으로 달려갔던 건 현재를 자유롭게 하는 작지만 큰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가슴을 쿵 하게 하는 울림이 있는 작품을 만나는 순간 행복하다. 피카소를 만났다. 피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