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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r 03. 2021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하는 이유

    

개학, 긴장이 넘치는 날이다. 오랜만에 매일 만나는 친구를 집 앞에서 만나고 학교로 가는 막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다. 엄마들이 늘 하는 말처럼 아기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살이다.      

학교에 다녀와서는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다.

“엄마! 우리 선생님 그래도 꽤 착한 느낌이야.”

아이가 절반의 안정을 찾은 모양이다. 앞으로 어떤 날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첫날은 그럭저럭 좋다.      

저녁에는 리모컨을 들고 있는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오늘 무슨 날인 거 알지? 8시 되면 ‘빨간 머리 앤’하는 날이야. 그거 봐야 해.”

애 아빠 역시 그 애니메이션이 싫지는 않은지 아무 답이 없다. 정확히 시간이 되자 채널을 돌린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빨간 머리 앤 이다. 졸린 눈을 비비고 함께 티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앤’은 막내와 내가 통하는 공통의 관심사다. 앤을 보면 기분이 설렌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해석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다이애나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어릴 적 잊고 있던 마음을 되살려 놓는다. 꽉 채운 두 시간 동안 아이는 하품하지 않고 초집중한다. 무엇 때문에 앤에게 끌리는 걸까? 아침을 먹다 말고 물었다.

“앤을 꼭 챙겨 보잖아. 앤 뭐가 좋아서 그래?”

“응~ 엄마, 음~ 그냥 앤이 좋아.”     


어떤 수식어를 달지 않고 ‘좋다’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어른이 되면 ‘좋다’는 말 뒤에 이어지는 무엇을 기대한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앤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돌이켜 보니 그냥 좋으면 된 것을 다시 분석하고 나열하는 일은 때로는 억지스럽다.  이유를 찾으려 함이 순수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나도 30여 년 전 앤을 좋아했다. 초록 지붕 위에서 세상을 향해 수다스럽게 말을 거는 앤의 모습이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어렸지만 앤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기에 참으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앤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였고, 동화였다. 매일 같은 옷을 입어도 자연 속에서 앤은 절로 눈부셨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했다. 무덤덤해 보이는 마릴라 아주머니와 깊은 속 마음을 살랑바람이 얼굴을 스치듯 조용히 언제나 한결같음으로 앤을 깊이 사랑하는 매슈 아저씨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사계절 에이번리히 풍경은 가보고 싶은 먼 나라의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집 주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6월이면 꽃피는 벚꽃나무는 또 다른 상상의 나라를 그리게 했다. 앤이 시냇가를 지나 다이애나를 만나 버드나무 연못과 숲 속 제비꽃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는 학교 가는 길은 한 번쯤 꼭 걸어보고 싶다. 그곳을 경험한 이라면 학교 가는 길이 걱정이나 불안을 안고 힘 빠진 어깨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그 길을 걷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고 싶은 곳이 되지 않을까.    

 

학교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작은 갈등에서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이 학예회 준비에 들어갔다. 선생님이 연극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배역을 정해주는데 여왕을 맡고 싶었던 아이가 이름이 불려지지 않자 연필을 와삭하고 부러뜨리는 게 아닌가? 초등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매년 12월이면 학교에서는 학예회가 열렸다. 부모님들은 학교를 찾았고, 학급마다 준비된 여러 가지를 선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캉캉춤을 하는데 나는 뽑히질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듬감과 운동신경에 둔했던 지라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상처를 입었다.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하고 빨갛게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었던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었다. 이런 감정을 느꼈던 탓에 앤에 등장하는 아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이는 화요일을 좋아한다. 앤이 찾아오는 까닭이다. 앤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현실의 어려움을 부푼 꿈으로 날려 버린다. 주변의 모든 게 앤에게 말을 건다. 앤은 생각하는 대로 답하고 투정하고 원망하고 눈물을 흘린다. 때로는 과할 만큼 몰입되어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다시 자연스럽게 돌아온다.     


앤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아침 떠오르는 태양도 앤에게는 축복이었다. 앤을 보고 있으면 나도 10대의 어린 아이다. 어른이 되어도 앤처럼 씩씩하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앤은 세상의 사람들이 미소 짓게 하는 큰 힘을 가졌다. 빨간 머리 앤은 긍정의 에너지가 살아 숨 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앤처럼 내 앞에 닥친 두려움들을 견디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는 어른이고 싶다. 돌아오는 화요일에도 아이와 빨간 머리 앤을 만나야겠다. 앤이 일상을 보내는 방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내 삶으로 들어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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