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점심 무렵부터 비가 내린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조용한 비다. 아침 운동을 다녀오고 잠깐 위층 언니네 집에서 차를 마셨다. 알고 지낸 지 10년, 친정 엄마 같다. 40년 주부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고 가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고마운 이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옛말처럼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하게 말을 건넨다.
오늘도 그러했다.
“그 싱크대 수납장 위에 있는 그림들 내 마음 같아선 다 떼어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그것 볼 때마다 너무 많아서 답답하고 그래. 좀 정리하면 훨씬 깔끔해 보일 것 같은데.”
나만의 갤러리라고 이름 붙이고는 좋아하는 그림과 사진 대 여섯 장을 붙여놓았었는데 그걸 두고 하는 말이다. 어느 날은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잠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너무 어지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도 그게 신경 쓰였나 보다.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내가 항상 어렵다고 생각하는 집안 정리부터 아이 교육까지 언니의 경험을 쉼 없이 얘기했다.
처음부터 언니의 얘기가 편했던 건 아니다. 성당에서 처음 만났는데 강한 인상 때문인지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을 때 언니는 기꺼이 달려와 아이를 돌봐주었다. 한 해 두 해 언니를 지켜보니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마음 깊은 이웃이었다. 그때부터 언니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쉽지 않은 얘기를 툭 던질 때는 마음이 불편했다가도 나를 위한 조언이라는 걸 알기에 잘 듣게 되었다.
언니네에서 30분 정도 머물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끼던 그림들을 떼어 냈다. 테이프 자국이 선명할 만큼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물렀던 것들은 먼지도 묻었고 빛도 바랬다. 망설이다가 몇 년을 두었던 것이 사라졌지만 아쉬움보다는 시원함이 먼저였다. 좁은 공간이 넓어 보이고 다시 무엇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부엌이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다. 세제를 적당량 묻혀서 싱크대 주변을 부지런히 닦아냈다. 오랜 세월이 묻어 있지만 한 시간 남짓 청소를 하니 그런대로 괜찮다. 이제부터 한두 시간은 내게 집중할 때다. 아침부터 앉고 싶었던 식탁, 내 자리에 앉았다. 지난 겨울날 주문해 둔 홍차를 꺼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영국을 상징하는 빨간 전화박스 차 상자가 매력적이다.
우리 집 부엌, 네 식구가 마주 앉는 식탁은 내 작은 서재다. 가끔 방에서 무언가를 하기도 하지만 식탁이 편하다. 차 한잔을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카페는 부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몇 걸음을 움직여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내 맘대로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혼자 오롯이 있을 때 가능하지만 말이다. 친구 혹은 이웃이 왔을 때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곳이기도 하다. 집에 오는 이 대부분이 주부인 까닭에 그들의 생활에서 몸에 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더불어 밥을 먹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 게 아닐까.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 일이 대단하게 느껴질 만큼 밥을 해서 상을 차려 내는 일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것으로 변해가는 요즘이다. 이런 현대인의 마음을 파고든 간편 식품들이 날게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트렌드가 되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던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를 활용한 초간단 요리든 식탁에 함께 앉아 먹을 때 행복하다. 그래서 식탁은 음식과 더불어 일상을 공유하는 출발점이다. 특별히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편하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털썩 앉으면 끝이다.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는 일이 나를 기쁘게 한다. 꼭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사라진 공간이 오히려 아름답다. 작은 변화가 전체를 환하게 한다. 무슨 날인 것처럼 열심히 움직여 부엌을 정리하고 살폈다. 봄이 왔으니 나와 가장 가까운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멋지게 인테리어를 하고 가꿔진 곳은 아니다.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하다. 그저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 무장해제시켜주는 고마운 곳이다.
부엌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나를 반긴다. 보리차 맛에 흠뻑 빠진 요즘 정수기 물을 가득 채운 주전자에 영암에서 자란 보리를 넣고 하루를 보낼 차를 끓인다. 그리고 라디오를 켜고 잠시 식탁에 앉는다. 단 몇 분 멍한 상태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정적에 빠져 있다 깨어난다. 나를 위한 여러 가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식구들을 위해서 맛있는 밥을 하고 때로는 귀찮다는 이유로 라면으로 대신하는 한 끼, 설거지가 싫어져서 다음날을 기약하는 게으름도 흔쾌히 받아준다. 봄날의 부엌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기대와 설렘이 몰려온다. 이곳에서 봄날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