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기에 빠져 봄

# 3

by 오진미


딸기의 날들이다. 빨간 고운 빛깔로 마음을 훔쳐 간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날 흐르는 차가운 물에 그것을 씻고 접시에 담아서 내놓으면 주위가 환해졌다. 봄이 기다려질 때였다. 길을 가다 문득 딸기 상자가 놓인 과일가게를 발견하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빨리 하나를 가져서 베어 물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처음으로 딸기 한 박스를 샀던 어느 날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농부의 수고로움으로 엄동설한의 찬 기운을 뚫고 자랐다는 이유로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는 게 습관이 된 주부의 입장에서 망설여졌다. 그러다 큰 마음먹고 장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돌아온 날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 딸기 사 왔어? 와 맛있겠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딸기다.


언제나 주말은 먹는 일이 최고의 관심사고 행복인 날이다. 삼시세끼를 먹는 중간에 과일이나 빵, 과자를 중심으로 당분으로 무장한 것들을 찾게 된다. 봄이 왔다. 밖에 내리쬐는 햇살이 부드럽다. 아침을 먹고 한참이 지나 뭔가를 먹고 싶어 질 무렵, 어제 사 온 딸기를 꺼냈다. 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온 가족이 둘러앉았는데 반응이 시큰둥하다. 누가 많이 먹을까 내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사라졌던 한 달 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딸기를 먹었으니 지겨워질 시간이었다. 처음의 설렘은 사라지고 흥미를 잃어가는 중인가 보다. 새로운 무엇을 해봐야 할 시기임을 직감한다. 조금 남아있는 딸기를 가지고 잼을 만들기로 했다. 딸기잼. 어릴 적에는 식빵에 이것을 발라먹는 일이 라면에 김밥처럼 여겨졌다. 노란 뚜껑의 잼을 종종 샀던 어린 자취생 시절도 떠오른다. 나를 위로해 줄 것이 필요했던 저녁에 가끔 옥수수 식빵에 잼을 잔뜩 발라 먹었다. FM 라디오를 들으며 특별할 것 없지만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달콤함이 고등학생 소녀의 고민을 잠시 잊게 했다.


두시 무렵부터 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딸기를 씻고 꼭지를 칼로 도려낸다. 스테인리스 냄비에 적당량의 설탕을 넣고 중간 불에서 끓이다 약불로 뭉근히 졸이는 단계를 거친다. 몇 대 몇이라는 황금비율이 있을 테지만 난 대충 짐작으로 만드는 일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조금의 설탕을 넣고 딸기가 생기를 잃어갈 즈음 다시 설탕을 더한다. 주걱으로 살살 저어 가다 제법 농도가 깊어질 무렵 불을 끈다. 40분 정도 오가며 딸기 상태를 살펴야 적당한 끈적임을 지닌 잼이 완성된다. 집안 곳곳에 딸기향이 퍼져나간다. 부담스럽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봄날처럼 짧지만 강렬하다.


딸기가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 잼으로 다시 아이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학교를 다녀온 애들에게 바삭하게 구운 빵에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잼을 발라 간식으로 주었다. 아이들은 긴장했던 몸이 사르르 풀린다. 하얀 요구르트에 잼 몇 스푼을 넣으면 밍밍했던 맛이 살아나고 금세 그릇이 비워진다. 딸기는 5월까지 내 주변을 맴돌 것이다. 날이 뜨거워진다는 생각이 들 무렵 딸기 두 상자가 한 묶음으로 판매될 만큼 가격이 내려가게 되면 잼의 날들이 돌아온다. 그때는 어느 집에서나 설탕을 만나 새 옷을 입는 딸기의 뜨거운 열정을 만날 시간이다.


봄은 딸기와 함께 오는 듯하다. 카페에서 딸기 메뉴가 선보일 즘 겨울을 뒤로하고 설레기 시작한다. 봄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옷장문을 열어 입을 게 있는지 확인하거나 새롭게 선보인 화사한 접시나 컵을 사고 싶어 진다. 딸기는 음료로 먼저 계절의 맛을 전한다. 뒤를 이어 딸기 케이크, 크루아상을 반으로 가른 다음 생크림 가득한 딸기 샌드위치, 초콜릿에 빠진 딸기 등 무엇에도 어울리는 카페 톱스타다. 그곳에서 이런 딸기의 무제한 변신인 메뉴들을 시키지 않더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쯤이면 난 딸기 바보다. 적당히 물기를 머금어 접시에 한가득 담긴 딸기는 어느 유명화가의 정물화보다도 아름답다.

딸기4-1.jpg

투명한 빨간색에 빠졌다. 딸기는 절정을 치닫다 인기가 식어갈 즈음 변신을 꾀하며 추억 속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잼을 만들어 놓거나 냉동실에 꽁꽁 얼려두면 딸기가 그리워질 즘에 봄을 기억하게 한다. 딸기의 시간을 더듬어 보니 살아가는 일상과 닮았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순간이 있지만 한결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지점에서 고개를 돌려 찬찬히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어렵지만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나를 웃게 만들었던 딸기의 화려함이 막을 내리면 냉장고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잼이라는 녀석이 탄생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아직 딸기의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참외가 벌써부터 딸기를 위협하고 있지만 시기상조다. 봄날의 딸기를 사랑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택배 두 상자로 봄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