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다른 날 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살짝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생강차와 유자차를 넣고 냄비에 끓였다. 컵에 가득 담고 호호 불어가며 마셨더니 불편하던 목이 편안해지면서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다. 학교와 회사로 모두가 떠나니 정신없는 아침이 지났다. 밖은 하루가 다르게 포근해진다. 매화꽃이 활짝 피었고 땅의 기운 역시 봄으로 돌아서서 잔디 사이로 초록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공원 벚꽃은 아직 멀었지만 꽃망울을 틔우기 위해 애쓰는 듯하다. 내가 봄 속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운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해졌다. 운동을 다녀와 보니 베개와 쿠션 커버 세탁이 끝났다. 우선 빨래를 널고는 간단히 집을 정리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혼자 식탁에 앉아 국화차를 마셨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느 집 인테리어 공사 소리에 잠깐 불편해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제 주문해둔 잡지책을 뒤적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게 되었다.
봄처럼 가볍게 먹고 싶었다. 봄을 담은 음식으로, 만드는 일도 설거지도 모두가 편해야 할 것. 샐러드로 정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가능한 재료들을 살폈다.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양배추, 오이 고추, 딸기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꺼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보니 여러 색이 참으로 곱다. 어제 저녁에 애들이 먹다 남은 치킨 한조각도 얇게 썰었다. 샐러드의 하이라이트는 소스다. 건강을 생각해 달지 않은 것으로 재료의 맛에 충실해 보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유자청을 꺼내 올리브 오일과 식초를 더했다. 새콤달콤 투명한 노란빛이 봄 개나리다.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데 허전하다는 생각에 자리를 옮겼다.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티비를 켰다. 채널을 돌려 보지만 특별히 맘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다. 그냥 음식에만 집중해야 할 모양이다. 가능한 천천히 먹었다. 입안에서 갖가지 것들이 만나 어울리는 느낌이 썩 괜찮다. 머릿속으로 ‘이건 파프리카네 이건 브로콜리 아 치킨이다’며 재료를 되뇐다. 그릇에 담긴 샐러드를 바라보니 빨강, 노랑, 초록, 연두 모두가 봄이다. 추운 겨울날 먹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생생하고 아삭한 야채들이 숨 쉬나 보다. 봄기운이 긴장했던 몸을 편하게 하니 식탁 위 음식도 달리 보인다.
큰 그릇에 담긴 샐러드를 깨끗하게 비웠다. 평범하지만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음식이었다. 포크로 열심히 먹던 중 언제나 속이 편하다며 나물을 찾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릴 적 시골밥상은 밭에서 나는 것들로 채워졌다. 배추나 무, 상추가 단골이었다. 아버지는 이것을 데치거나 그대로 쌈장에 찍어 먹는 걸 즐겼다.
“속이 편해야 일할 때도 몸에 부담이 덜하지. 나물에 된장이 최고야.”
늘 사람은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중년에 접어들어 보니 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아버지에게 나물 밥상이 있었다면 내게는 샐러드 한상이 놓였다.
하루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를 또렷이 알게 된 건 지난겨울이었다. 함박눈 펑펑 내리던 날 큰 아이가 유튜브로 몇 년 전 배우 김혜자의 대종상 수상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열심히 하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안 든다며 내게 얼굴을 묻었다. 어리다고 여겼던 아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어깨를 짓눌렀을 무게에 마음이 아팠다. 어느 지점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수상 장면을 찬찬히 보았다.
“…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배우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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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문득 이 말이 살아나 메아리쳤다. 다시 생생한 목소리로 들었다. 삶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파울로 코엘료가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하면 현재와 직면하기는 무척이나 힘들 듯하다. 가능한 것, 지금 한 발짝 움직임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지금 원하는 것을 찾아서 먹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밖으로 돌렸던 시선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 마음이 오래가도록, 몸에 익도록 봄날의 나는 움직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