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봄비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밖은 초록이들의 세상이 될듯하다. 아침에 뭘 먹을지 고민하다 청국장을 끓이기로 했다. 매일 내 손을 거치는 그릇 뚝배기가 들어온다. 무심코 사용하던 그것이 비가 오는 까닭인지 마음이 간다.
막내가 돌 무렵 동네 친환경 매장에서 구입했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을 계산해 보니 무려 8년을 훌쩍 넘겼다. 방앗간에 떡을 사러 가던 길에 옹기그릇을 판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다. 여러 종류의 그릇 사이로 뚝배기도 있었다. 엄마가 사용하던 뚝배기가 떠올랐다. 스테인리스 냄비에서 끓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며 부모님은 틈만 나면 뚝배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을뿐더러 깊은 맛이 있다는 것. 회사를 그만두고 주부로 지내고 있었기에 여유 있는 만큼 제대로 음식을 해 먹고 싶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날도 지금처럼 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엄마의 충고대로 쌀뜨물을 넣고 한번 팔팔 끓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불순물이 걸러지는 과정이며, 음식을 잘 만들기 위한 첫 마음이었다. 매일 뚝배기의 일은 이어졌다. 식구가 많지 않기에 찌개와 국을 담당하는 전용 그릇이 되었다.
뚝배기에 대한 내 사랑은 은근했지만 싫증 나는 일이 없었다. 20대부터 옹기그릇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책을 사보거나 관련 박물관에 가서 멋스러움에 빠져들었다.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다른 자기들에 비해 소박했다. 예부터 서민의 그릇으로 사랑받아온 이것은 보통의 삶에 스며들어도 무리가 없다. 가볍고 화려한 그릇들 사이에서 너무나 수수하다.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한다. 빛나지 않아서 편하고 그래서 더 정이 간다. 무겁기도 하거니와 검 갈색은 칙칙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잠깐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엄마의 마음 같다.
오래 쓴 만큼 어느 날은 그릇 가운데 실금이 갔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엄마에게 물었더니 밀가루를 한 스푼 넣어 끓여 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틈이 메꿔졌다. 다른 그릇 같으면 재활용 비닐에 담겨 사라졌을 일이다. 심란해도 힘을 내어 음식을 만들던 내 마음을 소리 없이 받아주었다. 가만히 그릇을 보고 있으려니 고요하지만 강하다. 본디 땅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흙에서 왔고 다른 것들은 섞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명품이라는 단어가 스친다. 뉴스에서 샤넬, 루이뷔통 등 럭셔리 제품을 사기 위해 아침부터 백화점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고 했다. 어떤 이는 3시간을 기다리다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야 매장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기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내가 가진 명품이 무엇이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브랜드의 그것들은 없다. 혼자 씩 웃었다.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 영국의 로얄알버트, 핀란드의 아띨라 등 다른 나라의 유명 그릇 브랜드들이 생각난다. 이제 몇 년 있으면 십 년이 다된 우리 집 뚝배기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명품의 분류에는 이름조차 올리는 게 낯설다. 그럼에도 내 주방의 명품을 꼽으라면 오랜 시간 맛있는 음식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한 이 그릇이 떠오른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한결같이 마음이 가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명품이다.
뚝배기에는 내 마음과 숨결이 고스란히 배었다. 수십 수백 번 이상 내 손이 거쳐 간 자리는 나만 아는 흔적이 남아있다. 화려하진 않고 담백하지만 제 일을 알아서 해내는 조용한 힘이 세월과 함께 무르익었다. 1~2분 동안 빨리 조리되는 간편 음식과는 정반대다. 충분한 시간을 내어 주어야 제맛을 낸다. 뚝배기에 무엇을 한다는 건 그만큼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단숨에 끝내버리려는 조급함이 밀려올 때 뚝배기에 음식을 만드는 순간 기다림을 알게 된다. 생각지도 않던 휴식이다.
천천히 육수를 만들고 30여 분을 끓여 청국장이 완성되었다. 멸치와 묵은 김치, 무가 전부지만 청국장 특유의 향에 고소함이 더해져 부드럽다. 추운 날 호호 불며 먹어야 제맛일 것 같지만 봄비 내리는 금요일 아침도 잘 어울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나무에 새싹이 돋고 동네 개나리들의 노란 축제가 열린다. 집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도로 건너 벚나무에 꽃이 피는 봄이 막 달려올 것 같다. 뚝배기에 냉이와 쑥을 넣고 봄을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