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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May 22. 2017

열아홉 마지막 농봉

생각보다, 
날은 맑았고
덕분에 많은 일을 했고
생각보다,
어둠은 짙었고
덕분에 많은 별을 보았고
생각보다,
시간은 빨랐고.

생각보다.




계속 꿈속을 거니는 것 같았어.
그렇게 몽롱하게, 끈적끈적한 시간 안에 머물면서
퍼뜩 정신이 들지 않을 것 같았어.
그런데 역시나 딱 마지막 순간에
딱 이곳을 떠나려는 순간에, 마음이 쿵 하더라.

이곳을 내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시간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여전히 그리워하며
영원히 기억하려 할 테지.

이곳에서의 첫 도착을
쏟아졌던 비를
몸빼바지를
옥수수 밭을, 복숭아꽃밭을, 사과 꽃밭을,
선크림을
우리가 처음 같이 심었던 나무를
카레 밥을, 김을, 제육볶음을, 요구르트를, 설거지를
너희와의 산책을
멀리뛰기하던 너희를
트럭을 타고, 경운기를 타고 이송되던 너희의 뒷모습을, 깊게 눌러쓴 모자들을,
줄 서서 기다리던 화장실 문 앞을
새벽 공기를, 양치하던 졸린 눈의 너희를,
이장님을, 햇살을, 아득한 별들을
낮잠을, 침낭을, 팔 토시를,
노래를, 카메라를, 농봉영상을
꼬박꼬박 찍었던 단체사진을
그만큼 늙-은 우리를, 
 신나게 학년 마피아를 하던 우리들을
마을회관 입구 계단에 앉아 멍하게 하늘만 봤던 순간을
갑자기 눈물을 쏟던 너를, 너희를, 나를. 
그래도 괜찮았던 그때를.
그래 결국 십삼기
우리가 함께했던 삼 년의 농봉을. 복탄리를.

사랑하는 십삼기.
이 아름다운 사람들아!
나는 여전히 사람이 그립고, 또 여전히 사람이 무서워.
나 역시 모두를 사랑할 자신은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까 겁이 나고,
문득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순간순간, 미친 듯이 외로워지고는 해.
이렇게나 불완전한 나는
그리고 너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겠지. 
꾸역꾸역 고민들을 삼키면서
꼭꼭 공허함을 씹으면서.
그러다가 아주 자신이 없어지는 어느 날에,
그러니까 푹 무너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냥 꼭 붙잡고, 뚝뚝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였으면 좋겠어.

한 친구가 그랬어.
고삼은 힘든 학년이 아니라, 슬픈 학년이라고.
모든 것과 점점 이별해야 하잖아. 
십삼기의 복탄리와 이별한 것처럼
십삼기와도 우린 곧 이별하겠지.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우리의 열아홉을, 어느 순간을, 너희를, 나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기록하는 것. 
그렇다면 결국
무엇도 남지 않는 이별은, 아니지 않을까.

이 불완전한 사람들아. 
이 아름다운 사람들아!

오늘도, 또다시 내일도
이 악물고 살아갈 사람들아.
부디 너희, 아프지 않길. 
부디 우리, 외롭지 않길.

이렇게나 사랑할 만한 사람들아,
사랑해.

2017, 
사월이십육일부터 사월이십팔일까지.
십삼기 마지막 농봉. 끝. 


-글. 이우고 3학년 안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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