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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Oct 02. 2021

7. 1차 세계대전


| 1차 세계대전

 열강들, 드디어 충돌하다



미리 기본 개념 익히기



1. 비스마르크  

   

2. 팽창주의     


3. 슬라브족/범슬라브주의   

       

4.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    

     

5. 소비에트     


6. 볼셰비키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과 식민지 획득 경쟁은 세계 곳곳에서 상호 대립과 충돌을 가져왔다. 아프리카에서 종단 정책을 펴던 영국과 횡단 정책을 펴던 프랑스가 충돌한 파쇼다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열강들 간의 대립과 충돌은 국제적 위기로 심화되었다. 그 시작은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모로코 사건이었다.

 해외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과 더불어 유럽 내부에서도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 군비 경쟁이 심화되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자 이들 간에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중 1882년에 성립된 삼국 동맹과 1907년에 맺어진 삼국 협상의 대립은 열강들 간의 전면전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삼국 동맹은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실각 이후 빌헬름 2세는 단순한 세력 균형을 넘어서서 팽창주의적 세계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독일의 새로운 팽창주의 정책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를 자극하여  이들 국가 간에 삼국 협상을 맺게 하였다.


 유럽의 화약고가 된 발칸 반도


독일의 3B 정책 추진과 삼국 협상의 출현 독일은 비잔티움(이스탄불)과 바그다드 간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이를 베를린과 잇는 3B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영국의 3C 정책과 충돌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투르크 및 지중해로의 진출 정책과도 부딪치는 것이었다.


 삼국 동맹 세력과 삼국 협상 세력은 모로코에 이어 발칸 반도에서도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이를 막으려 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의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세르비아의 불만이 높아졌다.

한편 1912년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 아래 불가리아, 그리스 등과 발칸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워 승리하였다(제1차 발칸 전쟁).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나머지 발칸 동맹국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불가리아가 패하였다(제2차 발칸 전쟁). 세르비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를 병합하려 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실패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이 더욱 격화되었다.

발칸 반도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심한 곳이었는데, 여기에 열강 간에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었다. 마침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바로 이곳에서 울려 퍼졌다.


병력의 동원. 선전포고 후 총동원령의 내려지자 유럽인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믿고 전쟁터로 향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의 전개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사건)

 이미 무력 충돌의 준비가 되어 있던 유럽 각 국은 이 사건을 참전의 구실로 삼았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맞서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협상국인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도 독일에 맞서 참전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불과 한 달여 만에 동맹국과 협상국이 참전하면서 세계 역사상 초유의 참혹한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각 국민들은 최소한의 인명손실로 빠른 시간 내에 자국이 승리할 것을 기대하면서 열광하였다. 그러나 곧 전쟁은 프랑스의 북동부와 러시아의 서부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조짐이 보이자 개전 초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각 국에서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이 커져갔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 규모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가 동맹국 편에 서서 참전하였으며 일본, 이탈리아 등이 연합국 편에 가담하였다. 이 밖에 많은 비유럽 국가 및 인도와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 주민들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또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으로 인해 미국도 고립주의 외교의 전통을 파기하고 참전하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동맹국의 전세는 불리해졌고 오스만 제국에 이어 오스트리아가 항복하였다 마침내 독일 킬 군항에서 일어난 해군 병사들의 반란으로 독일 황제가 망명하고 독일 임시정부는 연합국에 항복하였다.(1918. 11)




러시아 혁명



국가 주도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차르의 전제정치가 지속되었고 일반 민중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과 일부 지식인들은 체제 개혁운동을 벌였고 급진적 지식인들은 혁명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당이 결성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차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시위였음에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정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고 의회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개혁의 성과는 미미하였고 국민의 불만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전쟁 중지와 전제정치의 타도를 외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각지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소비에트 평의회를 결성하고 혁명을 일으켜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켰다(2월 혁명 1917). 그러나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개혁에 소극적이었고 전쟁은 지속되었다 이에 같은 해 10월 전쟁 중지와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한 국가건설을 주장하던 볼셰비키가 레닌의 지도 아래 봉기하여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10월 혁명).


<자료 1> 러시아 혁명


 제정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2월 노동자와 병사의 혁명과, 사회주의 정당이 중심이 된 의회에 의해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여 새로 구성된 임시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는 한편, 토지와 공장을 요구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부의 반란도 일어나 임시 정부는 더욱 어려움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1917년 10월 레닌 등이 지휘하는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각지에 노동자·병사와 농민의 정권인 소비에트를 조직함으로써 소비에트 연합(소련)이 성립하였다.
  소련은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는 한편, 제정 러시아 출신의 반혁명군의 저항과 혁명이 확대되는 것을 꺼려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간섭을 막아내면서 정권의 안정을 이루어 갔다. 그리고 농업과 공업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를 뒤바꾸어 놓았다.


<자료 2> 1차 세계 대전


(가)...... 1910년 이후  몇 년 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는 더욱 크고 격렬한 파업들이 새롭게 분출했다.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의 그 유명한 로렌스 파업이 일어나 열몇 개 나라    출신의 여성 노동자들 2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영국에서는 철도, 항만, 광산에서 시작된 대규모 파업이 다른 업종들로 확산되고 비숙련・미조직 노동자들로 참가한 '거대   한 동요'가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반 제국주의 시위, 5만 명의 금속 노동자가 참여   한 토리노 파업, 그리고 군인 10만 명이 투입됨으로써 겨우 진압된 이탈리아 북부 전역의 투쟁 물결이 있었고, 그 뒤로 또 한 번 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유혈 충돌을 빚은 앙   코나에서의 '적색 주간'이 있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모험을 벌임으로써 체제의 중심부를 안정시킬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변   화 끝에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누구도 보지 못한 채 유럽은 역사상 전대미문의 유혈 사태에 빠져 들었다.

(나) 제국주의가 식민지 사람들의 노예화를 뜻할 뿐 아니라 식민 열강들 사이의 전쟁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일찍이 태평양을 향해 세력권을 확장하던 러시아가, 조선을 통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중국 북부에서 충동한 1904년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모든 당사국이 상대방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나라마다 도시 중간 계급의 일부는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고 팽창시키려 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여러 방언과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인종 집단이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순수한 인종으로 구성된' 국민국가를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필요한 기준에 맞지 않는 민간인들을 추방하고 심지어 학살하는 것이었다...... 이런 압력   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는 대부분의 동유럽 지역과 과거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지역들에도 존재했다. 말하자면 발칸 지역 전체가 거대한 화약고였다.
그 폭발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1914년 7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보스니아 주의 수도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드러났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오스트리아인들을 몰아내고 보스니아를 이웃 세르비아와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는 어떤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도 매우 사소한 사건들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을 잘못된 판단과 오해의 연쇄 작용에서  비롯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소한 사건들은 커다란 사회 세력이나 정치 세력 사이의 균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의미심장한 사건이 된다.   점화플러그는 가장 값싼 자동차 부품들 중 하나이며, 혼자서는 어떤 것도 작동시킬 수   없다. 그러나 점화플러그는 엔진의 석유 증기의 폭발력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금 인상 자체는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있지만 국가나 거대한 사회 세력들이 충돌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서 등장한 제국주의 경쟁 열강들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경제적 경쟁이 영토 확장 경쟁으로 변했으며, 그 결말은 군사력에 좌우됐다. 사라예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나 충돌의 연쇄 작용이 시작된 이상 어느 국가도 물러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국가도 전 세계에서 자기 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을 고취했던 제국주의는 이제 유럽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으려 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1. 모로코 사건과 파쇼다 사건 발생의 공통적인 원인은?   


  

2. 삼국 동맹의 목적은?     



3. 삼국 협상의 목적은?     



4. 발칸반도는 왜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렸는가?    


 

5. 러일전쟁이 러시아 혁명이 끼친 영향은?     



6. <자료 1>을 참고하여 러시아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정리해 보아라.     



이건 뭘까?



1. <자료 1>과 <자료 2>의 (가)를 참고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해보아라


                              



2.  <자료 2>의 (다)를 참고하여 사라예보 사건이 1차 대전으로 확산되었던 상황을 설명해 보아라




                         

3.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확산되었던 이유를 <자료 2>의 (나)를 참고하여 설명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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