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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Oct 05. 2021

개학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


10월에 개학하는 학교


개학을 했다.

10월에 개학하는 학교가 있다.

검정고시를 지원하는 학교이다.


올해 처음으로 수원시민학교라는 곳에서

고졸 검정고시 수업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수업료는 무료다.

이곳의 모든 교사들은 무료 자원 봉사자이다.

나는 아니지만 많은 교사분들은 이곳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무료 수업과 후원금으로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것들을 충당한다.


검정고시는 1년에 2회 시험을 치르는데

8월에 검정고시가 끝나고 한 달 반 정도의 방학을 가지고

오늘부터 다시 4월 시험을 위해 개학을 했다.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


난 이곳에서 도덕을 수업한다.

역사교육이 전공이고 사회교육이 부전공이지만

이곳에서는 도덕을 가르친다.


전에 도덕을 가르쳤던 선생님께서 5년인가 6년인가를 하시고

내게 부탁을 하셨다.

그분은 기술이 전공인 현직 교사이다.

아니 최근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전에 알던 철학 전공 교사였던 분이

이곳에 와보니 영어를 가르치고 계셨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곳이라기보다는

교사 자원 때문에 끊김이 없는

어떻게든 무료 수업을 유지하는 곳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학자와 교사를 혼동한다.

역사를 전공한 것과 그리고 역사학자로 살아가는 배움과

역사교육을 전공한 것과 그리고 역사교사를 살아가는 배움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가르치는 것'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학문의 전문성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지만

학부 졸업 수준이면 된다.

그 정도의 배움과 가르치면서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배움을 기본으로

어떻게 더 교육 효과와 목표를 높이는 것에 집중한다.

학문의 전문성은 기본이지만 교수 학습의 전문성보다는 후순위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배움이라면

학문의 객관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학생들보다는 조금만 더 높은 수준, 혹은 학생들이 접하지 못하는 분야의 배움을 통해

가장 효과적이고 원하는 교육목표를 위한 수업을 한다.


교사로 재직했을 때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다.

스스로 설정한 도전의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다.

아이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것.

아이들이 접해보지 못한 분야.

학문의 객관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

딱 이 정도였다.


그래서 난 역사와 사회의 교사자격을 가지고

그 자격 조건을 넘어서지 않는 지침에 근거하여

대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새로운 분야의 청년 전문가들을 만나 배우기도 하면서

생태, 환경 수업도 했고, 도시 재생 수업도 했고, 공공 소통 디자인 수업도 했다.


그때의 경험과 차츰 쌓인 전문성이

지금 <소셜 임팩트 - 공공 소통 디자인>이라는 수업을 만들고

새로운 분야의 교육 사업가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정규 교육과정의 수준과 고졸 검정고시 수준은 분명 차이가 있다.

수능에 비하면 고졸 검정고시 수준은 많이 낮다.

그러나 생소한 도덕이라는 내용을 가르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늘 공부를 하고 간다.

철학을 좋아해서 공부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재밌다.


도덕을 공부하고 가르치러 가는 매주의 고정된 삶 속에서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그것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 역시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서 구분은 없다.


지난 8월 시험을 준비했던 분들은 60대로 보이는 세 분이었다.

이번에 새롭게 만난 분들은

10대 두 명, 50대 한 분, 그리고 베트남에서 오신 분이다.


지난 학기에 자퇴를 하고 이곳을 찾은 10대의 여학생이

베트남 분( 베트남 출신의 한국 분일 것이다. 검정고시를 볼 수 있다면 )의

옆에 앉아 내가 설명하는 단어와 개념을 계속 설명해주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 가르침과 배움은 교사와 학생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배움의 주고받음이 일어난다.

교사-> 학생, 학생-학생, 학생-> 학생, 교사-학생 그리고 학생-> 교사도 늘 교실 안에서는 성립한다.


배움의 공동체를 다시 생각해본다


수년 전, 아니 벌써 10년 단위로 셀 수 있는 오래 전인 것 같다.

경기도 교육청을 중심으로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가 공교육의 화두가 되었던 적이 있다.

여전히 그 중요성의 맥락은 핵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입기에 열심히 그것을 학습하고 수업에 적용하면서

경기도 교육청 교사들을 대상으로 사례 발표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한국 교원대의 박사과정에 있는 선생님의 논문 수업 사례로 제공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때 가장 안타까왔던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 꼽는 확산.

당연히 교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처럼 시도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문화가 아니 형식으로 이해이다.


배움의 공동체는 수업의 방식이 아니라 수업의 문화이다.

수업의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 제시한 몇 가지 핵심 사례는

ㄷ자로 책상 배치, 배움 주고받기, 교사의 교수 방법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 들여다 보기이다.


이것으로 인해 경기도 교육청의 교실 책상 배치는 ㄷ자로 정형화되었고

강의 중심의 교수 학습 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었고

수업 평가에서는 충분한 근거 없이 학생들이 사소한 몸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사례 발표나 강의에서 늘 배움의 공동체는 수업의 형식이 아니라 문화라고 강조했다.

아주 쉽다

서로 배움을 주고받는 수업, 그것에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구분 없이, 그리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과 배워야 하는 사람의 구분 없이 '서로 배움을 나누고 주고받는 문화'가 이루어지는 학교이다.


그런데 배움의 공동체는 형식만 남겼다. (코로나 이후에는 그 형식마저도 무너졌다)


1. 책상은 ㄷ자로

2. 강의 위주의 수업은 안됨

3. 학생들에게 배움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말하기

 - 물론 이건 좋으나 배움이 일어난 과정을 말해야 하는 수업 연구회가 중심이다 보니 이전에도 말한 것처럼 근거 없는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아주 힘든 수업 연구회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교육과정이나 수업 내용보다는 아이들의 몸짓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교사가 배움의 공동체를 잘 이해하는 교사가 되어버렸다.





학교나 학교 외에 교육 공간이나 그리고 우리가 몸담은 모든 곳에서 배움은 서로 일어난다.

그것이 모든 조직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배움이 크기가 서열을 만들기도 한다.

'배움 서로 일어난다'

그것을 인정하면 평등한 조직, 민주적인 조직은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그리고 조직의 혁신은 그것이 핵심일 수 있다.


학교, 회사, 공공기관에서 늘 존재하는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진단만  바뀔 수 있다면

조직의 평등과 민주, 그리고 혁신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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