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은 나무줄기에 생기는 나이테와 같은 말로, 살아온 세월과 함께 경험과 지혜가 쌓인 사람을 일컬을 때 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되었을 때, 연륜이 있는 어른을 찾곤 했다. 일상의 자잘한 과제부터 인간관계나 먹고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먼저 그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세웠다.
하지만 이것도 다 옛날이야기가 돼버린 것 같다. 오늘날에는 세대를 거듭하며 내려오던 문화, 관습, 가족의 형태, 생활방식, 인식, 종교, 생업 등 삶의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것들의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대'라는 말마저도 구닥다리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시작된 크고 작은 변화들은 점점 더 그 속도를 높여가며 범위와 깊이를 더해갔다. 그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 완전히 새롭게. 이제는 연륜이 있다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적다. 발 담가 본 적 없는 물에 대해 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속도가 붙어버린 세상의 변화는 멈출 줄을 모른다. 무언가가 매일매일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난다. 직업, 이념, 핫플, 아이돌, 앱, 자산유형, 유머코드, 통신기기, 가전, 단어, 결제방식, 개념, 레시피, 맛집 등 일일이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그중에서도 남녀노소 모두의 일상을 파고든 가장 큰 변화중 하나는 과연 음식 주문 방식일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이였을 때는(라떼는) 식당에 가면 백이면 백 서버가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왔지만, 어느새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방식이 생기더니 비대면 키오스크가 등장했다. 이 기계의 등장은 사람들을 압도했다. 비대면이 주는 자유와 평화를 얻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키오스크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키오스크 공포증'도 생겼다. 최근에는 큐알코드 주문방식도 나왔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으면 주문도 어려운 시대. 어버버 하다 보면 업데이트되고, 또 어버버 하다 보면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온다. 새로 접하고, 시도하고,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반복. 새로 접하고, 시도하고, 익숙해지고. 새로 접하고, 시도하고 익숙해지고...
한번 진도를 놓치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적분처럼, 알기를 포기하게 된 것들이 (연륜대신) 쌓여간다. 대외적으로는 관심을 끊었다고 표현하지만, 솔직히 못 따라가는 거다.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데도, 도저히 다 쫓아갈 수가 없다. 그게 처음에는 조금 쪽팔렸는데 이제는 대놓고 자조한다. 대놓고 자조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점점 많아지는 게 웃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실의 문제를 끌어안고 연륜이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이 급격히 줄었다. 급격히 줄었을 뿐 아니라 기성세대를 '라떼는'이란 말로 은근히 조롱하고 입막음한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가 부담스러웠던 기성세대. 이제는 완전히 뒤처졌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다 '라떼는..'운운하며 좋은 마음으로 조언을 좀 하고 싶어도 곧 요즘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는 현타가 올 것이다.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모든 것이 처음 같아서, 다시 새내기가 된 것 같은 회춘하는 기분이 들지도.... 아니 근데 요즘 새내기들은 아는 것이 많다니까요?
요즘 티비 광고를 보면 도대체 뭘 선전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아빠의 말이 애처롭게 떠오른다. 유독 덥거나 추운 날, 길에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는 노인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던 어떤 택시 기사님의 말도. 미적분은 포기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일상을 파고든 새로운 감각과 플랫폼을 포기하면 사는데 지장이 생긴다. 의사소통 불가. 이동의 부자유. 이쯤 되니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살짝 저릿해진다.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더더욱.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비록 자주 소외되지만, 스스로를 뒷방 노인네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가 부모님께 바라는 작은 소망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뒤흔드는 본질적인 위기 앞에서 발휘되는 분명한 힘이 있으니까. 그들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빽 삼아, 내가 씩씩하게 살고 있는 것이니까.
충분히 나이 들어서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려본다. 클래식 음악, 명화, 고전, 고택, 고목, 장인정신,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이나 존중, 신뢰와 같은 가치들을. 이 혼란한 세상 속에, 오랜 시간 잘 발효되어 여전히 감탄과 위안을 자아내는 것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연륜은 무시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