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노는 동안, 재수하던 친구가 낙방하고 휴학 후 편입을 준비하던 대학 동기가 학교로 되돌아왔다. 수개월 혹은 수년을 독서실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생활을 감내해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희망? 자신감? 인내심? 절박함? 내게는 그런 게 없었던가. 묘하게도 그 친구들은 또다시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공무원 시험, 행원 시험 뭐 그런 시험들을. 실패를 경험하고도 또다시 도전하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실패나 고생의 낌새가 느껴지면 덜 그럴싸한 목적지를 향해 더 쉬운 길로 방향을 트는 게 나의 방식이었으니까. 그건 다소 비겁하고 실망스러운 처사이기는 했지만, 어떤 목표를 잡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 나는 영 재능이 없었다. 모든 투자에는 원금 손실의 위험이 있듯,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는 일에도 당연히 손실의 부담이 따른다. 나는 1원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약은 젊은이였다. 주식보다는 저축을 택하는 쪽이었달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 따라 강남에 있는 편입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다. 한 달 만에 그만두었던 그 학원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빽빽하게 놓인 책걸상. 안경알 뒤로 보이는 피곤에 절은 눈들. 구부정한 어깨에 걸쳐진 담요. 벽에 붙은 모의고사 성적표... 첫날부터 이곳에서는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역주행해 숨 막혔던 고3 교실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학원비가 아까우니까 억지로 다녀봤다. 대학교 수업을 마친 후, 해 질 녘 도착하던 편입학원. 그 학원으로의 발길을 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첫 번째 모의고사였다. 망쳤냐고? 아니다. 처음치고 너무 잘 봤다. 너무 잘 봐서 뭐야, 별거 아니네, 하면서 사뿐하게 학원 건물에서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좀 괴짜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을 뿐이다. 당시 내가 희망하던 대학의 신문방송학과는 매년 단 한두 명의 편입생을 뽑았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적당히 잘할 자신은 있어도 1,2등을 할 자신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학원에서 본 수험생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떠올라 '너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어? 진짜? 잘 생각해 봐.'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당... 당연히 못하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면 진작에 편입학원에 문을 두드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잘한 선택이었을까? 지금에 와서 복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 편입에 성공했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테니 그 삶의 모양이 매우 궁금하다. 그래봤자 결국, '애엄마'가 되어 있으려나. 그때는 몰랐다(모르는 게 많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 일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간절히 바라던 꿈이 없었다는 게 서른 중반이 된 배 나온 여자에게 위로가 되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떡상도 손절도 없는 평타인생. 그래서 고작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은 결국 목표를 이뤘다. 원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제 몫을 해내는 친구들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대리만족이란 얼마나 쉽고 달콤한지...! 하지만 친구의 삶이 보람차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근 육아휴직 중인 친구가 복직을 할지 퇴사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복직을 선택했다. 젊은 날의 성취가 지금의 올가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넋두리가 그냥 하는 투정은 아닐 거다. 어쩌면 인생이란 손실도 이익도 없는 제로로 수렴하는 투자처인지도.
'큰 꿈을 가지라'는 청춘을 향한 주문은 거대한 속임수가 아닐까. 매일매일 새싹같이 작고 귀여운 꿈들을 이뤄가는 청춘(靑春)이야말로 더 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봄 같이만 살다가는 추운 겨울을 맞을 수도 있겠지. 겨울같이 산다고 해서 꼭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충분히 나이가 든 후에 젊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젊음을 더 풍요롭게 누릴 수 있을까? 우리의 젊음을 더 알뜰하게 소비하고 더 현명하게 투자할 수 있을까.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상상력을 낭비한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 Adam Levine - Lost Stars(비긴 어게인 ost) 중
*사진출처: 영화 비긴 어게인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