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다시 일터로 나가길 간절히 바라던 때가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정을 떠나 일터로 나가기 불가능했던 시기에 특히 그랬다. 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도 될 만큼 상황이 여유로워진 지금, 나는 더 이상 일터로 나가고 싶지가 않다. 웃기는 일이다.
집에서 살림을 가꾸고 아이들과 남편을 돌보는 지금의 생활이 좋다. 내가 속한 가정 안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 완벽하지 않은 나의 손길, 나의 존재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지를 안다. 비록 가끔,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볼 때면, 여전히 다소의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금방 털어버릴 수 있다. 전에는 일 안 하는 나를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주눅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저 얕은 호기심에 나온 질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남들이 나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이 있지 않다는 것도.
몇 달 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어느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수년만에 하는 이력서 업데이트에 1차 멘붕이 왔고, 인터뷰를 보고 나서 2차 멘붕이 왔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일하기엔 영어가 달리는 데다 번거롭게도 워킹비자를 서포트받아야 하는 외국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일을 구한다면 사정이 나아질까? 어중간한 대학을 졸업한 학사에, 경력단절 기간이 긴, 그 경력이란 것도 별로 보잘것없는, 취업시장에서 전혀 경쟁력 없는 후보일 뿐. 뭐,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객관적인 자료와 탈락의 경험이 주는 타격은 꽤 컸다. 며칠간 기력 없이 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혹시 극심한 인력난으로 인해 나 같은 인간을 합격시키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근심을 하기도 했다. 막상 붙으면, 일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감을 완전히 상실해서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출퇴근 시간을 지키고, 하루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 답답한 일상이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하..., 만약 합격하면, 뭐라고 말하며 거절하지?'
그러면서도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동시에 한 나는 사이코일까?
'나에겐 캐주얼한 옷 밖에 없는데...'
결국 그 사이코는 시원하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자유다!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나는 회사에 출근하기 글렀고, 그 사실에 숨통이 트였다.
"나는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에 정착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 삶을 살아버리는 것이 두렵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속 이 문장을 기억해 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작은 해프닝은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는 걸. 지금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속에서 자꾸만 '이러려고 태어난 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지금보다 더 훌륭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기대란 것은 이렇게나 쉽게 깨어지는 걸. 고작 한 번의 입사지원으로. 더 훌륭한 무언가가 고작 직장인이 되는 것이라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자주 내 명치를 누른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 유사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현실적인 불안감뿐 아니라 삶에 그럴싸한 의미를 더하고 싶은 욕구가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속의 나를 자꾸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것 같다. 하지만 대체 어떤 의미를? 육아로 한창 힘들고 지쳤던 시절, '인생에 의미가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던 나에게 '전에는 뭐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았냐'는 지인의 일침에 당황한 적이 있다. 그랬다. 내겐 아니에르노가 말하는 '내면의 목표'가 뚜렷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나란 인간은 목표를 싫어하는 인간이니까. 의미 찾기에 골몰하면서도 늘 그 근처를 배회할 뿐인 인간이니까.
나는 어쩌면 그저, 삶이 이토록 조용하고 편안할리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선가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행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내게 불행은 방심한 틈을 타고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이다. 폭풍전야의 고요. 그 정적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변화를 시도해 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