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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Apr 17. 2021

수면 독립 만세!

   어린 자녀가 있는 한국 가정에서는 대체로 부모 중 한쪽이 아이와 함께 자거나 온 가족이 함께 잔다. 남편의 나라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아이들은 대개 각자의 침실이 있고 거기에서 혼자 잔다. 프랑스에 갈 때마다 만나고 오는 남편의 친구 부부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들의 집에 가보면 부부 침실은 1층에 있고 자녀들의 침실은 모두 2층에 있다. 내가 그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막내 아이가 생후 6개월쯤이었다. 당시 미혼이던 나는 그 나이가 혼자 자기에 얼마나 어린 연령인가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 방문한 적이 있던 아이 있는 집을 떠올리며, 어떤 방식이 더 좋고 나쁘고를 떠나, 어떤 방식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육아방법이란 자고로 주 양육자가 편한 쪽을 택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식으로 키우든, 프랑스식으로 키우든 아이에 대한 건강한 사랑만 바탕에 있다면, 별문제 없이 큰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한에서, 나는 내게 편한 방법들을 취하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잠에 관해서라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아이와 따로 자고 싶었다. 그래야 내 수면의 질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지지 않을 것 같았으며, 아이와 분리된 나만의 시간 또한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사들인 육아용품은 당연 아기침대였다. 미술을 전공한 친구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그림을 아이 방 한쪽 벽 가득히 그려줬다. 아이가 본인의 방과 침대를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첫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집으로 온 날, 현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아이에게 우리 집을 소개했다. 조리원에서 정독한 책 「프랑스 아이처럼」에서 나온 그대로를 따라 했다. 책 육아와 현실 육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고들 하지만,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얻어걸리면 땡큐고, 아님 말고.


“아가야 여기가 바로 우리가 함께 살 집이야.”     

집안 곳곳을 보여주며 이야기했다.     

 “여기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 여기는 네가 목욕할 욕실, 이 쪽은 엄마 아빠 방, 그리고 여기는 바로 네 방이야! 여기 네 침대도 있고, 벽에 멋진 그림도 그려져 있어. 마음에 드니?”     

아이는 집에 온 첫날부터 제 방에서 혼자 잤다. 20평도 채 되지 않던 작은 집은 방문을 열어두면 전체가 한 방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나의 두 아이들은 심한 잠투정이 없었다. 배불리 먹여 공갈젖꼭지만 물려 침대에 뉘어주면 알아서 잠들었고 외려 안아주는 것을 불편해했다. 내 품이 충분히 넉넉하지 못했거나 요령이 부족해서였던 것 같다. 누구든 내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하곤 했으니까. 직장에 다닐 때 한 선배가 ‘일 잘하면 일만 는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 맞는지도 모르겠다. 편안히 안아줄 줄 모르는 엄마라서, 안아줄 일이 없어진 것을 보면.           

자기 전에 읽어 준 책을 보고 있는 딸아이.

   현재 만 3세, 5세인 아이들은 아직 아기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각 방을 쓰고 있다. 누군가와 한 방을 쓴 기억이 없는 아이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딸아이 같은 경우는 책을 한 권 읽어준 뒤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나오면 제 방 침대에 누워 혼자 중얼거리다 잠든다. 큰 아이는 잠들 때까지 누군가 곁에 있어주길 원해서 주로 아빠와 도란도란 밀담을 나누다 잠든다. 낮 동안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급속 충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남편도 좋은 눈치다.          


   돌아보면 나는 아이들이 잘 자는 것에 다소 집착했던 것도 같다. 몇 시에 자서 몇 시에 일어났는지를 기록하며 수면 패턴을 분석했고, 패턴이 분석된 후로는 외출을 했다가도 낮잠시간이 되기 전에 되도록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재우는 게 너무나 쉽기도 했던 데다가(그냥 침대에 뉘이면 되었으니까), 아이가 자기만의 공간에 누워 편히, 푹, 오래 자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밤에는 늦어도 9시에는 소등했다. 아이의 면역력과 평온한 성격 형성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육아가 시작되니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아이가 자는 동안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모든 자질구레한 노동을 멈추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을 악착같이 사수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나를 붙들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름 치밀하게 준비(하는 줄도 모르고 준비)한 수면 분리 전략과 아이들의 성향이 잘 맞아떨어졌기에, 우리 부부는 일찍이 ‘밤 육아’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했다. 수면 독립 만세! 그 덕에 나는 잘 자고, 남편과도 잘 지내며, 혼자만의 시간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육아 라이프에서 이거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되어준다. 잠이 뭐라고, 이 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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