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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Oct 04. 2021

조각

서로의 일부가 되는 우리

살면서 알게 되고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이 내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떤 습관, 어떤 마인드, 어떤 취향들은 내 안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다. 사실 나의 대부분의 것들은, 어쩌면 모든 것들은 타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루는 타인들. 때로는 독이, 때로는 약이 되던 타인들의 합이 나라는 필터를 통과해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외롭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서 참 여러 가지 염려들을 하게 되는데, 최근 새롭게 시작된 염려는 교우관계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는 제법 어린이다워졌다. 물렁물렁한 반죽 덩어리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굳기 시작한 반죽. 그럴싸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반죽. 학교 생활을 하면서 세세하게 다듬어지고 조금씩 더 단단해지겠지. 이제 곧 친구와 클래스메이트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아이에게 진심인 어른을 쉽게 알아채고, 엄마도 사실 조금 덜 떨어진 사람이란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자연스레 아이의 '그 사람(=어떤 방향으로든 영향을 주는 사람, 조각을 남기는 사람)' 또한 점차 늘어갈 것이다. 크고 작은 상처와 사랑을 나누게 될 '그 사람'은 나의 기대나 염려는 감히 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이와 연결되겠지. 그것이 나의 영역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컨트롤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와 잘 맞는 아이들로만 주변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 어느 부모나 그렇겠지만, 난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제 멋대로인 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 다정하고 순한 성향의 아이라서 혹여나 누군가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속상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결국엔 아이가 믿어왔던, 우리 부부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심어주었던 생각들과 태도들이 변해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쓸데없는 걱정일까? 너무 유난일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온실 안에 잘 가꾸어 놓은 나의 정원이 흐트러지지 않길 바라는데에서 오는 약간의 강박. 이 강박이 고개를 더 빳빳이 들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잔디를 깎고, 잡풀을 뜯어내고,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 것은 이제 아이의 몫이니까. 사실 이 정원은 내 것이 아니니까.


아이는 배울 것이다. 친절한 친구로부터. 무례한 친구로부터. 얄미운 친구로부터. 똑똑한 친구로부터. 주먹이 먼저 나가는 친구로부터. 조용한 친구로부터. 욕심 많은 친구로부터.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로부터. 예민한 친구로부터. 그러니까, 모두에게 배울 것이다. 이전의 내가 그랬듯이.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러하듯이. 타인의 조각들이 아이를 치대고 잘라 내고, 아이에게 와서 박히고 또 덧 붙여지고. 그렇게 계속해서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며 단단해지겠지. 그것은 내가 막을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이가 직접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일이다. 나는 그냥, 나나 잘하면 된다. 나 또한 하나의 조각이 되어 아이의 일부를 이룰 것이므로.


나의 '그 사람' 중 하나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덜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조각이 될까? 그것이 아이에게 잘 녹아들어 부드러운 면을 이루면 좋겠는데... 아마 영원히 명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라는 조각이 다른 어떤 조각보다 커다랄 것이라는 것만이 분명해져서, 정신이 번뜩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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