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조황] 대어는 없지만 잔챙이가 많아서 괜찮아
<글쓰기 일기> 2020 0309 05:03
지난해 낚시를 하러 바다를 자주 찾았다. 섬마을 민박집에서 조용히 글을 쓰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글쓰기보다 낚시가 우선이었다. 섬에 도착해서 바로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나갔다가 새벽까지 밤낚시를 즐겼다. 다음 날 방을 비워야 하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잠시 시간을 내서 글 한편 쓰는 정도였다.
이번에는 다르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숙소를 잡고 글부터 썼다. 잠깐 저녁을 먹고 해변을 산책했던 시간을 제외하고 숙소에서 글만 썼다. 밤 9시부터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다시 글을 쓰다가 결국 조개구이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바다 앞에서 먹는 조개구이 맛은 일품이었다.) 소주 한 병 더 마시고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다시 글을 썼다. 술을 마시고도 일어나 글을 쓰는 내가 대견하다. 벌써 새벽 5시다.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10편 이상의 초고를 썼다. 메모 수준의 초고이지만 이 정도 조황이면 괜찮다. 10편이라고 해봤자 원고지 10매 이내의 짧은 글들이다. 일단 '마을글쓰기' 책에서 기본 단계에 해당하는 초고를 모두 썼다. 일단 써냈다. 어떻게 고칠지는 나중에 생각하겠다.
여기 오기 전에 글쓰기 기본 단계 중 '메시지 정하기', '글감 찾기' 두 편만 완성한 상태였는데, '구성짜기', '표현하기', '문장과 퇴고'까지 초고를 써냈다. 그 외에 글쓰기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도 찾아서 글로 풀어봤다.
글을 써내면서 나의 글쓰기를 되돌아봤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는 '프리라이팅'에 너무 익숙해 있다 보니 정작 내가 책에서 제시하려고 했던 글쓰기 기본 단계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독자들에게는 글쓰는 단계를 알려주면서 나는 틀에 얽매이기 싫다며 아무런 사전 구상없이 그냥 쓰고 있었다. 그래, 글쓰기에는 정해진 틀이나 단계라는 건 없다. 하지만 글이 벽에 부딪혀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때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는 처방전이 필요하다. 기본 단계를 지켜가다보니 또 어떻게든 쓰게 됐다.
아무튼(아무튼이라는 단어를 쓰면 글 실력이 늘지 않는다. 말할 때나 자유롭게 글을 쓸 때 '아무튼'을 습관적으로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아무튼이다.) 이번 글쓰기 여행은 조황이 좋다. 이미 아이스박스 한 가득 글을 낚아 올렸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텐데, 글쓰기가 재미있어서 계속할 것 같다. 아니, 한숨 먼저 잘 수도 있겠다.
밤낚시를 할 때도 그랬다. 피곤해서 드러눕고 싶을 지경인데, 한 마리만 더 낚자며 버틴다. 그러다가 밀물이 썰물로 바뀌고 입질도 사라질 즈음 낚싯대를 접는다. 지금도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정신이 약간 혼미한 것 같기도 하지만, 눈에 힘을 주면 또 정신이 맑은 것 같기도 하다. 글을 더 쓰면 또 한편 낚아 올릴 것 같다. 그러다가 입질(영감)이 없으면 노트북을 접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것인지, 내 안에서 글을 길러 올리는 것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내 머리와 가슴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글을 쓰고 있다. 손가락이 알아서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자동적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방식을 자동기술 글쓰기라고 할까.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으니 그만 침대에 누워야겠다.
* 이 글을 쓰고 난 뒤,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손은 또 하나의 뇌이자 혀다."라는 문장과 마주쳤다. 이날 손가락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착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