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입김이 되어 날아간다.
어느덧 11월의 한가운데. 벌써부터 핸드폰 하나 맨손으로 붙잡고 걷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져 버렸다. 내게 여름과 겨울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나는 겨울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여름보다 겨울이 훨씬 좋지만 그만큼 미운 것이 바로 겨울이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나는 추운걸 못 견뎌한다. 좋아하는 것과 몸에 맞는 것의 괴리가 이리 큰 것이다. 약대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머리가 그만큼 좋질 않았고, 노래가 하고 싶었지만 성대가 나가 어느 날부터 소리가 나질 않았다. 로스쿨 진학은 인내 부족으로 중도하차, 행복할 줄로만 알았던 결혼생활은 성격차 및 성-격차 등등의 이유로 이혼위기를 맞이하였다.
나는 한랭두드러기성 피부다. 찬바람을 쫌만 오래 쐬었다 싶음 귓불이며 무릎, 발목 근처가 퉁퉁 부어오른다. 그토록 좋아하는 겨울을 버티지 못하는 몸인 것이다. 안타깝다.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새벽 들판에 첫 발자국을 새겨 넣는 게 얼마나 신나는데, 모닥불 피워 놓고 그 안의 감자, 고구마가 익길 기다리는 겨울 산중 캠핑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데 그걸 못한다. 한다 하더라도 기분만 내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피부를 부여잡고 고생할 테니까. 제게 맞지 않는 것을 꿈꾸면 이렇게 몸이 고생한다.
겨울이면 사무치는 외로움과 우울감이 유독 더 심해진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무에 있냐 싶을 정도로 겨울이 오면 인생이 나를 억지스러울 정도로 밀어내는 듯한 원망에 휩싸인다. 사랑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견뎌내야 하는 냉정한 계절. 아름다움을 온전히 내 것으로 껴안을 수 없는 아픔의 계절. 그래서 결국 내게 포기를 종용하는 잔인한 계절. 내게 겨울은 그렇다.
어느 순간 온 힘 다한 직장생활조차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승진이었고 한때는 그곳에서의 하루가 내 미래를 밝게 비춰줄 것만 같았는데, 막상 일정 위치에 올라와 보니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다. 또한 정상에 다다른다 한들 내게 뭐가 남을까 하는 헛헛함도 엄습했다.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의 나는 현실 속 나와 너무 달랐고 그 간극은 겨울 공기처럼 차갑게 폐부에 스며들었다. 청춘의 꿈은 잡으려 손 뻗을 때마다 사라져 버리는 안개처럼 이유도 핑계도 많아 기회는 늘 나를 서둘러 지나쳐갔다. 내 의지와 인내가 부족했던 걸까. 나는 과연 정말 이뤄내고 싶은 꿈이란 게 있는 걸까. 인생 경로를 잘못 설정한 걸까. 아니면 나라는 사람은 어딜 가도 결국 늘 비슷한 벽 앞에 좌절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지나온 날들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은 그래서 더 선명한 아픔이다. 이제 나는 내 아이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시련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할 예정이다. 제 의지박약의 옥동자를 아이들에게도 물려주려는 것이다. 하늘이 허락한 생명들에게 따뜻한 계절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차가운 현실로 내 모는 꼴이니 벌 받을거다. 나중에 이 벌 달게 받으리. 어제는 큰 아이가 진짜 이혼할 것이냐 물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는, 늘 그렇듯 미리 연습한 대로 엄마아빠는 비록 헤어지지만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는 틀에 박힌 뻔한 말로 아이를 달랬다. 쓴웃음을 지으며 마무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완벽했다. 안타깝지만 실로 그렇다. 이제 나는 남편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 부르기에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렇게 부를 자신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랑의 색과 향은 결코 그에게서 찾을 수 없으며 나 또한 그 모든 것을 거뒀으니 말이다. 그토록 원했던 행복은 이 겨울 안에선 그저 한 점 하얀 입김으로 공기 중에 흩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겨울은 내게 자꾸만 시선을 돌리라 한다. 머물면 안 된다 다그친다. 움직이지 않으면 동상에 걸리고 말 것이고 너를 썩게 만들 것이라 몰아붙인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움직여라. 잘라내라. 그래서 살아남으라 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계절은 이런 식으로 나를 품는 것이다. 상처투성이인데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보고 싶은 마음.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따스해지고 싶은 마음. 양가적 감정들이 매 순간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며 나를 또 어디론가 이끌고 있다.
바람이 조금만 스쳐도 살갗이 화끈하게 부어오르듯 작은 이벤트 하나에도 마음은 또 금세 들썩인다. 흔들리고 아프고 두려워지고 나는 왜 이리 연약할까.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이 추위를 견디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이 계절도 끝나리라는 아주 작은 가능성만을 손에 쥔 채. 차갑고도 조용한 이 겨울 한복판에서 흔들리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한 사람은
오늘도 그렇게 하얀 숨을 내뿜으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