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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Sep 04. 2021

막걸리는 정이다

비 오는날에 생각나는 막걸리 한잔

막걸리 한잔에 담긴 추억을 마시다







오늘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그 옛날 선술 집에서 마시던 막걸리와 파전이 생각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시골에서의 농사철에 비가 오는 날이면 농사일을 할 수가 없어 동네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 모여 다 같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파전을 부쳐 먹은 향수 때문에 떠오르는 추억이 아닌가 한다. 막걸리는 참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 술이다. 그래서인지 막걸리 주전자를 앞에 놓고 해물파전 같은 안주와 함께 작은 양은그릇을 부딪치며 감춰진 회포를 풀곤 했던 사람들의 소탈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내 아버지께서도 막걸리를 참으로 좋아하셨다. 그런 이유로 나와 형제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전자를 들고 동네 입구에 있는 허름한 주점에 가서 시원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서 아버지께 갖다 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아버지께서 중참으로 드시는 그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가다가 달착지근한 막걸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번 쫄쫄 빨아먹은 후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대접에 따라 붓던 아버지께서는 대뜸 '오늘따라 막걸리 주전자가 왜 이리 가볍니? 오다가 좀 쏟았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던 적이 있었다.  

   

옛날 직장에 다닐 때는 비 오는 날이면 언제나 퇴근하면서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동료가 “친구야, 비도 오는데 막걸리에 파전 어때?”하면 “좋지”라고 답하며 함께 마시던 그때 그 시절의 단골 식당이었던 둥굴관의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투영되어 오는 것만 같다. 특히 지금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묻혀 버렸지만, 그 당시 남산동 고려 다방 안 골목에는 아가씨까지 있는 선술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 퇴근 후 막걸리 한잔이 생각나면 동료들과 함께 찾아가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었다. 천정에 끈까지 매달아 놓고 검게 색이 바래고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의 막걸리 양까지 체크하며 마시며 동료가 부르는 유행가 곡에 장단을 맞추어 나무젓가락으로 술상을 한껏 두드리며 흥겨워했던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문득, 막걸리와 얽힌 추억 몇 건이 생각난다. 제대로 막걸리를 마시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학교 앞 식당이나 술집에서 친구들과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마시던 기억이 난다. 특히 먼저 군대 간 친구들이 휴가를 나오면 가장 싸게 배를 채운 게 막걸리였다.    

 



가장 기억이 남는 막걸리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기 전, 용돈을 벌겠다고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이른바 막노동을 할 때였다. 당시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면 참이란 것이 나왔는데, 늘 등장하는 음식이 막걸리 몇 통이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당시 술에 약했던 나는 공사장 아저씨들이 권하는 막걸리 몇 잔에 취해 구석진 곳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나중에 아저씨들이 점심 먹으러 가자며 흔드는 통에 깨어보니 12시가 다 되었다. 막걸리로 인해 2시간 가까이 일도 하지 못하고 뻗어버린 것이다. 같은 조에 함께 일하던 아저씨 한 분이 "반장님이 너 깨우지 말라고 했다"라고 전하며 쉬익 웃었다. 그 당시 반장님은 40대 초반의 건설회사 소속 직원이었는데, 아마 막냇동생 같았던 내가 힘든 공사판에 돈 벌겠다고 나온 게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막걸리 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우리 집 근처에는 작지만 아담한 산이 있다. 주말이면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르는 산이다. 나도 아파트 현관문을 나와 정상에 오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한 시간 반 남짓 걸리는 이 작은 산을 좋아한다. 그 산 정상에는 작은 정자와 체육시설이 있고, 한쪽 구석에는 막걸리를 파는 아저씨가 있다. 날씨가 아주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을 빼곤 언제나 그 자리에는 한잔에 천 원 하는 막걸리에 땅콩 안주를 먹으며 정상의 기분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실 갈증을 푸는 데는 막걸리만 한 것도 없다. 사이다나 콜라는 마실 때는 시원하고 좋지만 돌아서면 금세 목이 또 탄다. 산 정상에 올라 마시는 냉막걸리 한잔은 청량감이 가득해 더위를 잊게 해주는 것만 같다. 더구나 하산하는 내 귓전에 들리는 아저씨의 말이 술을 먹었다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가볍다.


“사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정입니다."     


얼마 전 연휴를 맞아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산에 올랐더니 그 자리가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막걸리를 팔던 아저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코로나19 때문인 듯하다는 생각과 함께 한동안 막걸리 맛은 잊어야 할 것 같다. 오늘따라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주던 그 막걸리 한잔의 정이 더욱 생각 나는 비 내리는 날의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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