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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Sep 21. 2021

가을이면 더하는 그리움

계절 탓인지, 나이 탓인지






           

가을이 성큼 다가와 마음을 휘감으니 왠지 모를 그리움이 안개처럼 깔려온다. 빛바랜 헝겊처럼 얕은 물감을 내뱉는 느티나무 잎새가 아침 햇살에 한 해의 아쉬움을 털어내고 있다. 거실 창가에서 바라보는 가을 꽃잎이 불그레한 낯빛으로 수줍은 듯 피어난다. 여름 한낮에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던 분수는 입을 다문 체 다시 올 시간과의 해후를 위해 침묵 속에 곤히 잠들어 있다. 주방 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멀리 서 있는 아파트 건물 한쪽에는 주민들이 걸어놓은 듯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마도 자기들 아파트 앞에 새로 신축하는 아파트가 채광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나는 지금 혼자서 먹고 비운 밥그릇과 국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르며 설거지에 열중하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시간에는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주방을 위한 나만의 지혜이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 몸짓 이리라.    


옛날에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어른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금남의 구역’인 것처럼 금기시했지만, 요즘에야 남녀가 하는 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세상이 아닐까. 하기야 아직도 옛날에 들을 법한 소리를 하는 남자들이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라면 한 그릇도 직접 끊인 적이 없다거나, 손에 물을 묻혀 싱크대 앞에 서본 적 없다는 소리를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사람들이 딴 세상 사람같이 느껴져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누구든지 시간이 나는 사람이 가벼운 운동이라 생각하고 먼저 행동하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의 차이일 뿐 어떤 일이든 생각을 바꾸면 아무 일도 아니다. 요즘에는 남녀의 일이 구분이 없는 중성화 시대가 아닌가. 남자들이 여가 시간의 일부 만이라도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오래 산다는 통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일리노이대 연구진'에 따르면 집안일을 분담하는 부부일수록 결혼 생활이 오래 유지된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추석이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편이라 코로나의 영향이 있어도 가족  이동이 많은  같다. 이제 코로나19, 1 접종자 수도 전체 국민의 70% 넘어섰다니 다행이다. 코로나로 변한 모든 것에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한동안  친인척들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며 안부를 전해 본다. 스마트폰 메시지엔 잊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카톡 추석 인사 이미지를 보내고 있다. 너무 의례적인 인사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어제는 시골에서 캠벨 포도농사에  빠져있는 여동생으로부터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라는 사진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화로 얘기하기보단 이미지 인사가  편하고 쉬운 모양이다.  추석엔 나도 캘리그래피로 추석 이미지를 만들어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야   같다. 모두가 각자의 일에 만족하며 행복해졌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가을이 오니 마음속에 괜한 외로움이 불쑥 자라는 것만 같다. 떠나간 사람이 그립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전화라도 한 통 해서 안부라도 전해주자. ‘보름달 같이 밝고 풍성한 추석 명절을 보내라고’. 행여 가을을 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헤아리다 바라본 책장에서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책을 뽑아 들고 목차를 훑어본다.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간다. 정말이지 책을 한 번에 다 읽겠다는 상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최근 많이 읽는다는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얄팍한 지식에 기대어 착각하고 살고 있을 줄도 모르는 인생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잃는 순간마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의 답을 찾아 여행할 것을 권하는 내용의 책이라고 한다. 추석 연휴에 완독 한다는 것은 기우지만 목차를 골라 읽고 싶은 대목만은 읽어 볼 생각이다. 가을은 여전히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니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함마저 느껴진다. 한껏 열어 놓았던 창문을 이제는 닫을 때가 되었나 보다. 창문 가까이 놓아둔 작은 화분에서 작은 꽃을 피우든 식물조차 몸을 움츠리는 것만 같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나이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남아있는 것은 온통 못다 한 것들에 대한 회한뿐 인 것만 같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작은 일들에 대한 의미가 조금은 무겁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부모님에 대한 못다 한 효도가 아쉽고, 아내를 더 사랑해주지 못한 간절한 후회가 간절하고,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일 등 모든 것이 아쉽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을바람에 떨어진 한 잎 낙엽을 바라보며 느끼는 계절 탓인지.      


바람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시간, 달빛은 어느 센가 그리움을 묻혀 잊었던 사랑을 기억해내듯 내 안에 흠뻑 젖어 있다. 오늘 밤엔 잠들기 전에 조용히 눈을 감고 가을이면 더하는 그리움을 꺼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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