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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Jul 09. 2020

괄호 안에 갇힌 숙제

마음속에 숨겨 둔 첫사랑을 향한 혼잣말






괄호는 자기 안에 감춰둔 속마음이며, 지나온 자기 삶의 의미 있는 흔적이다.


오래전 학창 시절, 신학기가 되면 누구나 어김없이 작성해야 했던 ‘가정환경 조사표’가 있었다. 항목별로 난감한 질문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가장 망설이게 한 질문은 장래희망이었다. 학생 대부분은 약속이나 한 듯 대통령, 법관, 의사, 선생님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을 괄호 안에 적어 넣었다. 그때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학창 시절 꿈꾸었던 괄호는 허상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욕망이 괄호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게을리해온 글쓰기, 독서, 캘리그래피, 영화보기, 헬스, 봉사하기 등 낯익은 소박한 꿈들이 괄호 안에 자리 잡았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과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내 생각들이 존재하는 은밀한 괄호. 그것은 어린 시절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보석이기도 하고, 꿈 많은 학창 시절의 소풍처럼 즐거운 추억이기도 하며, 마음속에 숨겨 둔 첫사랑을 향한 혼잣말이기도 하다.




가을학기 수필강좌를 수강하면서부터, 오랫동안 내면에 잠재해 있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괄호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꺼져있던 소망이 다시 점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거울 앞에 섰다.

 ‘열정적이다’, ‘몰입한다’, ‘미쳐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고통을 수반한 작업이라지만 다시 힘을 내었다.

나는 괄호 안에 감춰진 즐거움과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 속에서, 실타래를 풀듯이 조심조심 글쓰기의 파편을 찾아 하나씩 맞춰 나갈 것이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뽑아내는 비단 명주실의 신비함처럼 느껴져 오는 창작의 기쁨과 함께.




두 번째 강의가 있던 날, 수강시간에 앞서 조금 일찍 도착해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든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서관 정원 남쪽엔 가을을 품은 배롱나무, 모과나무, 단풍나무 등이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 옹기종기 서 있었다. 배롱나무의 홍자색 꽃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눈웃음을 보낸다. 먼 시간을 돌아온 수필을 향한 나의 열정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길 바라는 듯.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를 켜고 자판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며 그 속으로 외로움이 밀려든다. 손을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응시한 체 잠시 침묵 속에 빠졌다. 빛바랜 기억 속으로 떠나는 혼자만의 외롭고 긴 여행을 꿈꾸면서.




안톤 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읽는 동안 엉뚱한 상상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배짱이 두둑해지는 경험처럼, 행복이 충전되는 멋진 수필을 써보고 싶다.

‘수박씨를 먹으면 내 뱃속에서 커다란 수박이 자라는 상상’처럼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수필을 쓸 것이다.


최근엔 수필 습작에 빠져, 나의 괄호 안 무수한 조건과 입맞춤을 위해 몇 날 며칠째 기억 속의 광장을 헤매고 다녔다. 단어를 암기하듯 메모와 습작을 반복하며 삶의 의미를 투영해 주는 습작에 몰입해 갔다. 어쩌다 힘겹게 쓴 짧은 몇 줄의 글을 읽다, 만족감보다 무너지는 허탈감에 지우는 일이 일상처럼 내게서 떠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난무하는 고통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뒤덮을 때, 괄호 안의 나에게 혼잣말로 문답한다.   

‘넌 잘할 수 있을까?’

‘얽힌 기억의 교차점에 서서 진솔하고 담백한 글쓰기에 정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넌 달라져 있을 거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사람들이 내 글에 감명의 댓글을 달며 은밀한 행복감에 젖어 있을까?

초조한 마음에 시계를 쳐다보듯, 글쓰기를 하면서 곁눈질을 해본다. 나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할 많은 사람의 괄호까지는 욕심내지 않지만 깊은 공감을 채운 괄호를 읽다 보면 탐이 난다.


너무 높은 곳에서 날고 있어 닿을 수 없는 연(鳶)처럼. 글쓰기는 이제 내 인생의 괄호 안에 갇힌 또 하나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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