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둘째는 아침에 유치원 등원할 때마다 운동장에서 한바탕 놀고 간다. 최근 그네 타는 요령 익히느라 아주 낑낑대고 있다. 어깨 높이 정도 줄을 잡고 앞으로 나갈 때마다 몸을 쭉 뻗고 뒤로 갈 때는 몸을 웅크리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잘 모르겠나 보다. 앞으로 나갈 때마다 배를 내미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아이가 무언가를 배울 때 엄마는 그 과정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게 좋다. 실수를 해도 '괜찮아' 한 마디만 하고 아이가 작은 성공 하나 이루면 그때 칭찬해 주면 된다.
반대로 아이가 자전거를 배울 때 넘어지지 않게 뒤에서 잡아주고 왜 안 되는 건지 일일이 가르쳐 주면 아이 자존심에 상처만 남긴다.
오늘도 아이는 운동장에서 한바탕 뛰고 수돗가 앞에서 운동화 안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고 있었다.
철퍼덕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자기 눈높이까지 신발을 들어 올려 제법 힘주어 턴다.
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근처에는 야산이 하나 있는데 가벼운 운동하기 딱 적당한 높이라 동네분들이 뭐 거창한 준비할 것도 없이 매일 운동삼아 오르시곤 한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산에서 내려오셨는지 수도에서 손을 씻다가 우리 아이 하는 모양을 가만히 보신다.
"유치원생이에요?"
"네"
"아이고 참 작다. 금방 클 텐데... 남의 애 보면 이렇게 작은데 우리 아이 키울 땐 왜 그렇게 뭐라고 했는지 몰라. 이렇게 작은데..."
나이가 70세는 족히 넘으셨을 분이었다. 자녀들도 모두 성인이 되었으리라.
아주머니가 한창 자녀들을 키울 때는 아이들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였으리라. 다 애들 잘되라고 그런 것이니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할걸 하는 아쉬움을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아이 잘 키우라는 당부도 엿보였다.
그래도 결국은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 손녀들을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시나 보다.
다그쳐봐야 아무 소용없고 그저 다정하게, 사랑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결국은 알게 되었으니까 얼마나 다행인가?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보았던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갓 아이를 낳은 초보 엄마로 세상 혼자 잘났고 내가 하는 게 다 맞다는 과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다. 아이에겐 청결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으며 자기 할 일도 똑 부러지게 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세상 중요한 엄마였다.
여유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아이보다 나를 중심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엄마였다.
방송의 주제는 격대교육(隔代敎育)이었다.
중학생 손자와 할머니가 주인공인데 손자는 원래 부모님과 도시에서 함께 살았다. 학교에서 성적도 그저 그렇고 친구들과도 좀 문제가 있어서 부모님이 큰 결심을 했나 보다.
모두 접고 할머니랑 함께 살라는 결정
무슨 그런 결정을 내리냐? 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언가 내막이 있을 거다. 아이가 할머니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라는 맥락 같은 것 말이다.
하여간 그 아이는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산다. 물론 그 동네 중학교로 전학 왔다.
그런데 이건 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수준이다. 방송에 나올 정도이니 아주 특별한 케이스이긴 했을 거다.
학교 성적은 쭉쭉 올라 전교 TOP의 자리에 오르고 여유 있고 웃음이 많은 다정한 아이가 되었다.
방송의 취지에 맞게 그 원인은 할머니에게 있었는데 그분은 손자에게 무조건 잘한다 잘한다 했다. 이전보다 못해도 무조건 잘했다 잘했다 했다.
할머니가 보기에 손자는 정말 뭐든지 잘했다.
사랑만 듬뿍 받은 그 아이는 참 괜찮을 아이가 되어 갔다.
그 방송의 결론은 주인공 할머니처럼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격대교육(隔代敎育)은 아이 정서가 안정되고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상대를 배려하는 폭넓은 이해심까지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조부모님들의 한결같은 태도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결과로 아이가 인지적, 정서적 모든 영역에서 조화롭게 성장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아이의 할머니 단 한 사람이 이룬 성과는 눈부셨다.
'카우아이섬 종단 연구'도 유사한 교훈을 주는 유명한 실험이다.
하와이 군도 북서쪽에 위치한 카우아이섬 주민들은 대대로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려온 절망적인 지역이라고 한다. 여러 연구자들이 1954년에 그 지역에서 태어난 아기들 833명을 30년간 종단 연구했다.
연구자들은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로 성장할 거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 결과가 놀랍다. 고위험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72명의 아이들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훌륭하게 자랐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그 아이 주변에 있었던 어떤 한 사람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경우이든 무조건 믿어주고 무조건 사랑해준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엄마 아빠이기도, 할머니 할아버지이기도, 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 단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아이의 평생 인생을 끌어주었다는 거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해진다.
우리나라 대학 입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할 정도이니 우리 부모들이 아이가 커갈수록 조급해지고 더 잘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다 이해할 만하다.
어릴 적 아이가 자전거 배울 때 뒤뚱뒤뚱거려도 아이를 믿고 지켜만 보고 한 번에 몇 미터 쭉 나가는 작은 성공 하나 이루면 크게 칭찬해주는 여유를 끝까지 갖는 것은 사실 극기 훈련에 가깝다.
어떤 상황이건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끝까지 믿고 무조건 사랑하는 단 한 사람.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단 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이제 마흔의 한 복판 부모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조금이나마 받은 것을 되돌려 줄 때이다.
그것이 우리 아이에게 내가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일이고 더 나아가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일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