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호주오픈 우승 기념. 페더러를 통해본 테니스 역사
1. 1998년 윔블던 - 주니어 챔피언
서브앤발리의 황제 피트 샘프라스가 밥먹듯이 윔블던을 우승하던 그 시절, 주니어 단식 챔피언이었던 로저 페더러. 주니어 시절 페더러의 테니스를 보고 향후 메이저 챔피언 감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피트 샘프라스를 뛰어넘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2. 2000년 시드니 올림픽 - 평생의 동반자
18살의 페더러는 유망주임은 분명했지만 4강까지 진출한것은 매우 놀라울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성과보다 더 특별한 일이 이 올림픽에서 있었다. 그의 연인이자 매니저, 때로는 코치가 되어준 미르카를 스위스 국가대표 훈련 과정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3. 2001년 윔블던 16강전 - 전설과의 한판
이 16강전은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잔디코트의 황제들의 시합이 아니었을까. The Battle between GOATs. 가장 위대한 서브&발리 플레이어 - 샘프라스- 가 그의 후계자- 페더러-와 붙었다. 당시 19세의 페더러는 서브&발리 스타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1pjcK7nFY
이 경기에서 황제 샘프라스를 서브&발리로 꺽은 페더러는 정말 세계 테니스계에 큰 충격이었다. 다만 8강전에서 패함으로서 페더러의 각성이 일어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참고로 이때 페더러가 샘프라스를 이겨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선수는 고란 이바니세비치이다. 역대 최강의 서버로 아직도 인정받는 그는 아가시와 샘프라스에 막혀 번번히 우승을 못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었는데, 2001년 윔블던에서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우승까지 하게 된다.
3. 2002년 윔블던 1회전
어느덧 7번시드까지 받고 기세 등등했던 페더러. 그러나 1회전에서 탈락하게 된다. 페더러는 당시 자신은 결국 동시대의 라이벌들인 휴잇, 날반디안, 그리고 아직 현역으로 뛰는 레전드 아가시등을 넘지 못하지 않을까 의심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페더러의 멘탈은 아직 미성숙 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때 윔블던 결승은 휴잇과 날반디안 이었다. 잔디가 바뀌어서 인지 서브&발리 선수들이 기를 펴지 못했고, 결승에서 서브&발리 없이 스트로크 대결만으로 휴잇이 우승을 하게 된다.
4. 2002년 - 은사 코치 카터의 죽음
코치 카터라는 영화가 있다. (안봤으면 강추). 그리고 페더러에게도 카터라는 이름의 코치가 있었다. 페더러의 예술 테니스의 기반을 다져준 인물로 평가받는 그가 37살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소중한 지인의 죽음은 일시적으로는 페더러를 흔들었지만, 장기적으로 페더러가 성숙해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즈음부터 페더러의 아내가 된 미르카는 테니스 선수 생활을 접고 매니저이자 연인으로 항상 투어를 같이 다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페더러는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된 선수가 되었다.
5. 2001~2003년 - 페더러의 백핸드의 성장
2001년 이후 윔블던의 잔디가 바뀌면서 바운스가 높아졌다. 이는 서브&발리가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 아니게 되었고, 선수들은 맨땅/흙/잔디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강하고 지속적인 스트로크를 바탕으로한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워낙 재능이 뛰어난 페더러였기에 베이스라인 스타일로도 잘 했지만, 그의 유일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백핸드를 지속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선수들 (아가시, 휴잇, 날반디안)에게는 약점을 보였다. 2002년까지의 전적을 살펴보면,
- 아가시에 3패.
- 휴잇 2승 6패.
- 날반디안에 2패
반면 페더러의 백핸드로 지독하게 공격을 하기에 백핸드도 약하고 정신적으로도 답답해했던 앤디로딕상대로는 3승으로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페더러는 백핸드 기술도 어느정도 완성하며 그의 라이벌들도 압도하게 된다. 이 이후 전적은
- 아가시 8승 무패.
- 휴잇 16승 3패.
- 날반디안 11승 6패.
이후 페더러는 자신의 백핸드가 그 누구를 상대로도 다 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2004년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한 18살짜리 왼손 소년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면서 이 약점이 또다시 드러나게 된다. 페더러는 백핸드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포핸드보다는 불편한 백핸드를 지속적으로 치게되면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을 극복하는 것도 필요했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part 2에.)
5. 2003년 윔블던 - 페더러의 각성
2003년은 한국팬들에게도 특별하다. 페더러의 1회전 상대가 이형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3:0으로 졌지만 윔블던 본선에 한국 선수가 당당히 출전하고 있었다. 2001년 샘프라스를 이겼던 19살 테니스 신동은 코치의 죽음, 연인의 동반을 통한 멘탈의 성장, 기술적으로는 백핸드 스트로크의 발전을 바탕으로 너무나도 멋진 테니스를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테니스 황제가 올것임을 알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4KDSRHs49Y
6. 2004년 호주오픈 - 황제 페더러 즉위
2003년 윔블던을 황제의 즉위로 보지 않는 이유는, 앤디 로딕이 US오픈을 우승하며 랭킹 1위로 2003년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수들이 약했기에 페더러가 쉽게 1위에 올랐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장신 테니스 천재 마라 사핀. 파워 테니스 날반디안. 근성 테니스 레이튼 휴잇. 광속 서버 앤디 로딕. 조각 미남 페레로. 그리고 여전히 건재했던 전설 아가시. 샘프라스 은퇴 이후에 많은 강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2004년 호주오픈에서 날반디안, 페레로, 사핀을 차례로 꺾으며 페더러는 1위로 올라섰고 이후 2008년 윔블던까지 그는 1위를 237주간 지켰다.
https://www.youtube.com/watch?v=6HLprbnRKfI
to be continued. (18살 왼손 소년, 19살 체력이 유일한 약점인 소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