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개월짜리 계약서
남희 : 삼개 월요? 지금 계약하는 게 삼 개월짜리란 말씀이시죠?
인사부장: 네. 저희도 일단 뽑아 놓고 추가로 발생하는 그, 비용을 좀 줄여야 하니깐요.
남희: 근데 전 시험도 쳤고 면접도 두 번이나 봤고 정규직으로 뽑는다고 해서 입사한 건데요. 정규직으로 계약을 하고 수습기간이 삼 개월이 아니라, 지금 이건 삼 개월 계약직이란 거잖아요.
인사부장: 남희 씨, 그게 달리 말하면 삼 개월 안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근로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희 씨 입장에서도 그게 나을 걸? 우리도 사람을 믿고 뽑았지만 혹시 모르는 기간을 만들어 두는 거고요.
남희: 전 이해가 안 돼요. 계약을 맺어도 이어갈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계약이 깨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 같거든요. 근로 기록 안 남다는 건 사대보험도 적용 안 된다는 거네요?
인사부장: 사대보험 적용 안돼요. 계약서는 일단 삼개 월로 쓰고 기간 만료될 때 정규직으로 계약하면 돼요. 평가를 잘 받으시면 되잖아요, 인턴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붙을 생각을 하면 되는 거에요. 자, 여기 사인하면 돼요.
남희: 잠시 생각 좀 해볼 게요. 이런 건 사전에 공유해주셨어야지 이렇게 계약서 쓰는 데서 통보하시니까 당황스러워서요. 저랑 같이 입사한 다른 분들도 이렇게 계약했나요?
인사부장: 다른 분들 계약 상황은 공유해드리기가 좀 곤란해요. 그럼 서명은 내일 하시겠어요? 벌써 전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요.
남희: 다른 정규직 계약할 곳 포기하고 왔는데 이런 식으로 통보하니까 진짜 어이가 없네요. 전 그냥 동의만 해야 하나요?
인사부장: 남희 씨, 정규직으로 붙을 확률이 더 높다니까요.
남희: 부장님이 평가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인사부장: 제가 실무 팀장님께 잘 말씀드리면 되죠.
남희: 그럼 계약서도 정규직으로 작성하게 해달라고 말씀해주세요.
인사부장: 아니, 그건 팀장님이 정하신 거라 더 상의를 할 수가 없어요. 실무자 입장에서도 아무리 경력직이어도 좀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한 거라니깐요.
남희: 전 그럼 내일부터 안 나올 게요. 이것도 통보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정리하시죠.
인사부장: 남희 씨, 퇴사하면 갈 데 있어요?
남희: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고요. 저 나가볼게요.
팀장: 남희 씨, 왜 표정이 안 좋아?
남희: 팀장님이 삼 개월 계약직으로 써보자고 하셨어요? 팀장님이 여기 계셔서 믿고 온 건데 너무하시네요. 사람 불안하게 해서 최대한 기죽이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경력이 몇 년인데 이런 식으로 대우하세요? 사전에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다른 데 포기하고 올 일도 없을 거 아녜요.
팀장: 아니,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목소리 좀 낮춰.
남희: 저랑 같이 디자인부로 온 다른 과장님도 그렇게 계약하셨어요?
팀장: 다른 직원들 계약 내용은 나도 말해줄 수가 없어. 그리고 남희 씨 곧 결혼할 거라고 그러지 않았어?그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내 소개로 왔는데 바로 그러면 좀 그렇잖아.
남희: 팀장님.
팀장: 사람 뽑는 것도 비용이 들어서 그래. 형식적인 거야. 나도 남희 씨랑 오래 같이 일하면 좋지.
남희: 팀장님!
팀장: 서로 좋자고 이러는 거야. 남희 씨도 근로 기록 남으면 좋을 거 없잖아?
남희: 처음부터 그냥 삼 개월만 쓰려고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결혼할 나이 운운하지 마시고요. 전 이런 계약 안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잘들 계세요.
<리어왕> 수업에 앞서 대화 쓰기 과제.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아무래도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옮기게 된다. 등장인물 성별은 일부러 적지 않았다. 수업에서 수강생들과 직접 대본을 읽었는데 연기한 학생들은 모두 여성으로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현실에 함께 속상해해주었다.
문장을 잘 쓰는 사람과 대사를 잘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알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써야 하는가보다. 대사 한 문장에 자음을 몇 개 사용하냐에 따라 속도감이 달라진다. 단순히 문장 길이에 따라 속도감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