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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Jan 14. 2019

나이 듦에 미성숙한 우리들

우리집 노견의 탁한 눈을 바라보며


@pixabay


나이 듦에 미성숙한 우리들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바둑이'는 집안으로 들어와 '애완견'이 됐고, 이제는 가족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반려견'이 됐다. 동물권을 보호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반려동물을 위한 다양한 제품과 케어 서비스들이 생겨났고, '펫 관련 산업'도 떠오르는 분야가 됐다. 여전히 동물을 유행하는 액세서리처럼 키우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애완'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고 어색해진 것은 사실이다. 애완에서 반려로 인식이 바뀌며 오히려 동물과 함께 살며 보필(!) 하는 '집사'라는 단어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통용되고 있다. 인간 중심적인 작법에서 동물권을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권을 생각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나이 든 동물'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 자리잡는 것은 아직 먼 이야기 같다.

2000년대 초반 경기가 다소 안정화되며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집 안에서도 키울 수 있는 요크셔테리어부터 말티즈, 시추, 치와와 같은 소형견이 인기리에 분양된 것이다. 개의 평균 수명(12~18년)을 생각하면 지금쯤 무지개다리를 건넌 아이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열 살 이상의 노견老犬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료부터 목욕 용품, 산책 용품에 이르기까지 노견을 위한 전용 제품의 종류와 수는 현저히 적다. 반려견 전용 장례 업체가 생긴 것도 몇 년이 채 안 된다. 펫 산업 규모가 훨씬 큰 일본은 노견만을 보살피는 케어 숍이 따로 있을 정도로 나이 든 동물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고 보편적인 데 비해 우리의 펫 산업은 오직 어리고 젊은 동물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우리가 동물인데도, 다른 동물 역시 나이가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걸까.



노인들이 고백하는 비밀 중 하나는,
70세나 80세가 되어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의 몸은 변한다.
하지만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

-도리스 레싱

엄마와 아이와 개. 망원동에서 ⓒalice.k



너무 빨리 나이 들어버린 내 동생


우리 집 개, 랖이는 올해로 열여섯 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 랖이는 할머니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와 랖이는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단짝이다. 매일 함께 마실을 나가고 함께 사귄 할머니 친구들, 동물 친구들과 오후 시간을 보내고 귀가한다. 랖이는 그렇게 할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이제는 할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버렸다. 식구들 가운데 랖이의 시간이 가장 빠르게 흘렀다. 랖이와 함께한 16년 동안 나는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었지만, 랖이는 어린아이에서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올 때면 랖이는 내 허리춤까지 뛰어오르며 반겨주었지만, 이제는 방석에 누운 채로 퇴근하는 나를 바라보며 꼬리만 휘휘 저을 뿐이다. 근육질에 힘이 넘치던 랖이는 어느새,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힘이 없어서 다리가 떨리는 노견이 되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식구들과 하는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하며 호기심도 왕성하다. 다만 너무 빨리 나이 들어 버렸을 뿐. 열여섯 살 랖이의 까맣던 눈동자는 많이 탁해졌고 남은 이빨도 거의 없지만 내게는 여전히 귀여운 막내동생이다. 


몇 해 전부터 랖이를 위해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동물병원을 가야 할 일이 생기면서 예전보다 지출이 훨씬 늘어났기 때문이다. 나중을 대비해 반려동물 장례 업체도 알아두었다. 그러다가도 병원에서 스무 살을 훌쩍 넘겨도 건강하게 지내는 반려견들을 만나면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랖이와 함께 산책할 때면 나이 든 개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애완견이 반려견이 되었듯 노견을 위한 따뜻한 시선도 점차 당연해지리라 믿는다. 


랖이가 나의 십 대, 이십 대를 함께 해주었듯, 나도 랖이의 이십 대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고 엄마, 아빠는 어떤 개였는지 랖이의 탄생은 알 수 없어도, 언제고 마지막은 함께 하길.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랖이의 탁한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매일 저녁 말을 건다. 대답을 들을 수는 없어도, 우리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니까. 



랖이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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