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맥주란
맥주를 마시면 금세 배가 불렀다. 탄산음료보다 목 넘김이 수월하지만, 맛은 영 심심한 것이 술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이런 아쉬움은 맥주가 소주보다 비쌌기에 구차한 변명을 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눈치 없이 맥주를 시키면 학과 선배들의 잔소리가 이어지곤 했다. 아무튼, 술을 마실 때는 소주를 주로 마셨고 어쩌다 주머니가 두둑한 날에는 소맥을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이 모든 건 술이 마냥 궁금했던, 철없던 20대 초반의 기억이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맥주를 마음껏 사댔다. 퇴근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술동무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았다. 샤워 후 편한 옷을 입고 시원한 맥주 캔을 따는 소리. 그 청량한 마중은 나를 행복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서 이 맛이 사라졌다.
나에게 맥주란 기쁨이었다.
쇼핑 카트에 좋아하는 맥주를 가득 담았다. 무겁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남편이 맥주를 담은 상자를 낑낑대며 주방으로 옮겨주면, 나는 커다란 냉장고에 그것들을 하나씩 넣으며 정렬하는 기쁨을 누렸다. 편의점 사장님이 신제품 입고하는 것처럼 맥주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았다. 새 냉장고에서 맥주가 차갑게 변하면 요리도 완성되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만든 첫 솜씨, 남편의 음식 평가를 앞두고 언제나 떨렸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오빤 말만 하면 돼’라는 눈빛을 계속 발사하면 AI 같은 모범답안이 절로 나왔다. 시선으로 강요한 ‘응, 맛있어’라는 말이 한동안 진심인 줄 알았다. 신이 나서 내가 요리를 잘하는 줄 착각했더랬다. 요리사의 기쁨이 충만한 식탁에 맥주가 빠지면 서운할 터. 차가운 맥주를 까며 청량한 소리를 둘이서 들었다. 그렇게 들이켠 맥주와 저녁 칼로리는 우리에게 살을 선사했다.
나에게 맥주란 그리움이었다.
뱃속에 콩보다 작은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술을 먹고 싶은 생각이 아예 사라졌다는 점이다. 모체의 본능으로 아이를 지켜내는 것인지 실로 감탄했던 날들이다. 술도 안 마시고 커피도 줄이니 피부가 예술이었다. 30년 인생 피부로서는 리즈 시절이었다. 문제는 출산 후였다. 신생아 때는 엄마가 된 나도 함께 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고갈되면서 인간의 본성이 고개를 들었다. 모유 수유도 끝내니 그간 벼르던 일을 반드시 이행하고 싶었다. 온종일 먹이고 재우고 씻기기 노동을 반복한 신체에 휴식을 주려 한 것이다. 노동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모성애로 억눌렸던 맥주 한잔에 대한 욕구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날을 잡고 드디어 캔을 깠다.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동안 나는 맥주를 몹시 그리워했다.
지금 나에게 맥주란 외로움이다.
그런 날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몹시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모두가 잠든 밤에 특히 그렇다. 적당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면, 외로움은 마음의 빈틈을 타고 순식간에 나를 장악한다. 카톡 말고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이왕이면 직접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유부 신분은 두 발의 자유를 제한한다. Freedom! 너무나도 갈망하지만 이내 포기한다. 그게 가족을 위한 길이니까. 외로움을 밀어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위로, 격려, 공감이란 감정을 전해줄 이가 없기에 외로움은 밖으로 빠져나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즐기자는 결론이 나는데, 이때 맥주 한 캔이 간절하다. 나에게서 맥주가 외로움이 된 사정이다.
다소 복잡해진 감정을 담은 유부녀의 맥주이기에 과거 퇴근 후 까던 맥주 캔과는 결이 다르다. 오늘 밤 지친 그대에게 맥주 한 캔을 권하고 싶다. 그 맥주는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드릴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