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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ug 08. 2020

여름날 쏟아진 빗물

아픈 여름 비

어디를 둘러봐도 여름 산에 둘러싸였다. 나무만큼 짙어진 매미 소리가 사위를 메우자 온 마을이 문을 열고 어린 우리를 차례로 반겼다. 아까부터 밖을 내다보셨을 할머니의 웃음을 안고 대문을 들어서면, 안방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가 기쁨 서린 거동으로 문지방을 넘으셨다. 마당 수돗가에 다가가 새파란 호스를 빼고 은빛 수도꼭지를 돌려 손을 씻었다. 소리마저 시원한 그 물로 후텁지근함을 날리고자 팔과 발에도 끼얹고 내친김에 세수도 했다. 산골이 선사하는 청량함을 온몸에 적시며 여기에 와서 나 역시 반갑다는 표현을 대신한 것이리라.



자고로 맞바람이 불어야 시원하다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다. 이미 모든 문을 열어놓은 안방에 앉으면 뒷산과 저 멀리 앞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공간을 휘감고 반대 문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목침을 베고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뜨다가 뒤뜰에 알알이 열린 연두 포도와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저었다. 아주 어렸던 날, 호기심에 맛보던 그 예쁜 포도가 인상이 써지도록 시었기에 그냥 바라만 보기로 했던 것이다. 다시 앉아 대문 너머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비닐하우스 옆 텃밭에는 배추며 고추며 채소가 쪼르르 이어졌다. 작물은 그곳에서 뜨거운 볕을 쬐며, 바람 따라 흔들리기도 하면서 가끔은 하늘이, 어쩌다 내가 주는 물로 무럭무럭 자랐다.



옆집을 지나 산길로 향하는 길에 샘물이 흘렀다. 깊은 아궁이처럼 생긴 샘에는 늘 깨끗한 물이 고여 있었는데, 약수터 바가지로 떠마시면 언제든 갈증이 사라졌다. 심부름으로 식사 때 마실 물을 길어 오기도 하는 그곳은 작은 마을에 꼭 필요한 삶의 원천이었다. 물길이 이어지다 조금은 더 깊게 팬 곳에서는 빨래를 했다. 어린아이들은 그곳에 발을 담가보고 잎을 따다 물에 띄우며 놀았다. 여름날 샘물은 서늘함이 절로 느껴졌는데, 그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이파리가 촘촘한 커다란 나무가 우리를 감쌌기 때문이다.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구웠다.



집 앞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왼쪽에는 논이, 오른쪽에는 봇도랑이 흘렀다. 한들거리는 버드나무를 바라보다가 혹시 물에 빠질까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다 보면 넓은 고추밭이 나왔는데 내 키만큼 자란 고추나무숲에는 빨갛고 초록빛 파란 고추가 탐스럽게 달렸다. 어른들이 내준 길을 따라 끝에 닿으면 증조부, 증조모의 산소가 있었다. 산 밑에 위치한 그곳에서 인사를 드리고 물에 뛰어들었다. 허벅지까지 차는 물에서 목욕 같은 물놀이를 하고 생쥐 같은 꼴로 나와 풀과 흙을 묻히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은 어른들이 어망으로 작은 고기를 잡고자 노력한 것 같다. 물고기를 먹은 기억은 없지만.



두 물, 즉 샘물과 봇도랑이 만나는 곳이 있었는데 도로와 마을을 이어주던 커다란 다리 아래에 흐르던 내였다. 한때 나는 그곳이 강인 줄 알았다. 차가 지나다니던 다리를 한참 건너기에, 그 밑에 물살이 제법 세기에, 그리고 어떤 지점은 꽤 깊기에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다리 옆길로 조심스럽게 내려와 수풀을 헤치고 물에 발을 담갔다. 다슬기를 잡고 다리 밑에 앉아 쩌렁대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날씨에 따라 메마르기도 다시 풍부해지기도 하면서 이 줄기는 어딘가로 계속 흘렀다. 아주 어린 날에 할머니와 함께 시장 구경을 위해 버스를 타면서 이 물의 종착지를 알게 되었다. 갈수록 넓어지는 내를 따라가다 더 길어지는 다리를 몇 번 건너면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강이 기다렸다. 도담삼봉을 감싸는 이 강은 오늘도 어김없이 흐르는 남한강이다.



며칠 동안 이어진 비로 샘물이 터지고 봇도랑의 물이 넘쳐 논으로 흘렀단다. 작은 다리를 다시 놔야 한다고, 집기가 물에 떠다니고 진흙탕으로 변한 곳곳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수확을 앞둔 특산품은 생명을 잃었고 겨울을 나기 위해 기다린 곡식은 물에 잠겼다고. 토사가 떠밀려 내려와 헤아리기 힘든 피해를 보았고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익숙한 이웃 동네가 연일 뉴스에 나왔다. 듣도 보도 못한 비는 내 고향, 아니 전국 곳곳에 수마를 남겼다. 누군가에게는 회상의 장소,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일 곳. 이 야속한 비는 각자의 여름 기억을 다르게 물들이고 있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곳의 안녕이 걱정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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