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Aug 31. 2020

다시 멈춘 일상, 멈출 수 없는 육아

다시 일상이 멈췄다. 서울시는 9월 6일까지 멈춤 주간으로 선포했고 이에 따라 남편의 재택근무도 연장되었다. 뉴스를 볼수록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겁이 난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을 지키는 일뿐이다. 익숙해진 집콕에 별다를 바 없는 주말이지만 걱정을 담은 시선으로 창밖을 자주 살폈다. 설상가상 비도 오락가락하는 주말이었다. 날씨 탓인지 쉽게 늘어지고 잠도 쏟아졌다. 주말은 지난 평일의 휴식이자, 다음 주를 준비하는 시간이니 무리하지 않고 싶었다.



간과한 문제가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휴식을 위한 주말이지만,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네 살 인생에 코로나를 알고 이 나쁜 병균이 없어져야 모든 약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꼬마. 답답한 집에서 온종일 보내야 한다는 걸 받아들였다. 방 안에 놀잇감이 가득하고, 제아무리 좋은 장난감이라도 같이 놀아주는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주말이라 좀 쉬고 싶은 아빠, 엄마에게 돌아가며 놀아달라고 청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오늘도 혼자 노는 법을 배웠다.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지 더 아기 때 놀았던 딸랑이, 곰 인형 같은 장난감을 꺼내 놀고, 수영복을 찾아 입고, 옥토넛과 시크릿 쥬쥬를 집에 초대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며, TV도 알아서 켜보았다.



각자 자유 시간을 보내며 집콕 주말이 순조로운 것 같았다. 책을 읽는데, 잘 놀던 아이가 나에게 달려와서 무언가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엄마, 엄마, 그거! 그거 빵빵. 저기 베란다에 있는 거.”


한창 몰입 중이었는데 흐름이 끊겨 버린 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수록 아이의 요구는 강해졌다. 점차, 떼로 변했고 나는 화가 치솟았다. 아이에게 화를 내면 항상 후회만 남기에, 영혼까지 인내를 끌어모아 아이의 말을 다시 들어보았다. 본인도 설명할 방도가 없어 답답한 모양인지 귀여운 주먹이 콩콩대는 것 같았다. 잘 들어보니까 작년 여름 물놀이에 썼던 튜브를 찾는 모양이었다. 어디에다가 놓았는지 기억나지 않아 밤 10시에 창고 대방출이 일어났다. 미니멀 라이프를 꿈꾼 결과 모든 잡화가 그곳에 모였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이사 1주년 기념 청소를 마쳤지만 찾던 물건은 없었다. 소름 돋게도 아이가 처음 가리켰던 곳에서 튜브를 찾았다. 어쨌든 미션을 완수했으니 다시 책을 읽으려 하는데…



“엄마, 이거 불어줘.”

“이 튜브는 바람이 많이 들어가서 수영장 기계가 필요해. 그리고 밤이니까 내일 놀자. 알았지?

“시져. 지금 해줘. 해줘. 해줘. 아빠~~!”

방 안에서 들리는 아빠의 대답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아이를 찾아보니 혼자 소리 죽여 울기 직전이었다. 그 설움 가득한 쪼그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토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뿔싸!


이게 뭐라고 우리 딸을 울리 다니. 튜브에 바람을 불어보지도 않고 핑계만 대던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시도도 안 해봤으면서! 불다가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이 생각이 들자마자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총 세 칸으로 이어진 바람길에 날숨을 모아 튜브가 살아나길 빌었다. 조금씩 부푸는 모습에 아이가 웃음을 찾았다. 계속 불다 보니 복근이 당겨서 운동도 되는 것 같았다. 모양을 찾을수록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끝내 해냈다. 엄마 이산화탄소로 만든 튜브라 더 소중한 모양인지 자꾸 방방 뛰었다. 기계로만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람은 모든 걸 할 수 있다. 아니, 엄빠는 해낸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하셨다. 나에게 육아란 ‘아(我)’와 ‘모(母)’의 투쟁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30년간 혼자였던 ‘나’라는 정체성과 아이의 나이로 새롭게 자라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하루에도 수차례 충돌한다. 튜브 사건처럼 그 정체성은 갑자기 순위가 바뀌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특히, 요즘처럼 바깥바람을 쐬지 못하면 혼자만의 시간이 결핍되어 화가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처럼 말이다. 그래도 그 시간이 지나면 아이에게 무한한 미안함이 피어오른다. 혼자 노는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이고, 튜브를 퇴짜 맞고 숨죽여 울던 그 모습에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집안에만 갇힌 아이는 오죽 답답할까. 놀이터만 나가도 신나게 뛰어놀며 마음껏 웃던 일상이 몹시도 그리운 날이다. 이 멈춤이 부디 모두의 일상을 찾는 길이기를 소망한다. 마침 오늘 아침 신문 기사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의 교과서를 본 엄마의 이야기였다. ‘나의 봄은 어땠나요’라는 질문에 마스크를 쓴 학생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옆에 ‘마스크를 썼어요’라는 말을 남겼단다. 색칠 하나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웃고 있었다고. 엄마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학생의 웃음에 우리 아이의 웃음이 겹쳐 보였다. 어머니의 눈물에 나도 미안함이 머물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쓰고 싶은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