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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Oct 24. 2021

이방인




차라리 취중진담이면 좋겠다. 맨 정신으로 글을 쓰는 게 점점 힘겨워진다. 이제껏 쌓아온 서툰 문장들이 그 끝을 향해 내딛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발가 벗겨진 기분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정말 괜찮은 건가? 부끄럽다. 죄를 술로 술술 덮어버리는 영악한 죄인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아무튼 나는 술 대신 양심껏 한번 더 펜을 쥐어 본다. 모든 것이 기적이며 모든 것에 간절했던 그날의 인도로 되돌아가 보자. 그래서 그 여행의 끝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을까.


<Bread of Life>에서 오믈렛을 하나 주문해 끼니를 대충 때웠다. 계산을 하며 빵과 과자, 음료수도 추가로 넉넉히 샀다. 나는 곧장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일정이었다. 가는 길에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물이 부족해지면 극도로 예민해 헛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다. 인도 여행에서 이동 중 물과 식량은 불가결한 조건이다. 보름 동안 함께 여행을 떠나왔던 나의 오랜 대학 동기와도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빵가게 앞에서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나는 여행의 종착지인 다르질링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까지 도보로는 무리였으므로 근처에서 오토릭샤를 잡아 타기로 했다. 그런데 홀로 길을 나서자 둘일 때 보다 더 만만한 호갱님이 되어버렸다. 릭샤꾼들은 거금을 부르며 내게 흥정했다. 나름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완강한 ‘꾼’들 앞에서 햇병아리 수준의 내 기술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에요!” 항의해 보기도 했다. 다른 릭샤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어도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낮은 가격으로 유인한 뒤, 엔진에 시동을 거는 순간 가격을 높여버리는 것이다.


기나긴 흥정 끝에 겨우 오토릭샤 위에 올랐다. 다행히 시동을 거는 순간에도 요금의 변화는 없었다. 그렇게 20분가량을 달린 끝에 어딘지도 모를 길바닥에 버려져야 했다. “무갈사라이 역에 가야 한다고요!” 항의를 해보았지만 릭샤꾼은 뻔뻔했다. ”몰라. 여기서 다시 오토릭샤를 갈아타.” ”뭐라고요?” ”거긴 너무 멀어.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오토릭샤를 잡아 타라고.” 적반하장이었다. 나는  하게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무거운 배낭과 바리바리 싸든 짐을 챙겨 일단은 걸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고  것인지  멀리서 릭샤꾼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흥정꾼들이 반갑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데자뷰처럼 끝도 없는 흥정을 시작했고, 그중 가장 정상적인 요금을 부르는 꾼과 거래를 했다. 그렇게 다시 오토릭샤를 타고 한참을 달리고서야  앞에 무사히 도착할  있었다.


“요금을 더 줘야겠어.”


오토릭샤를 세우자마자 그 역시 태도를 바꿨다. ”요금을 더 줘. 멀리까지 왔으니까.” ”요금이라면 이미 줬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해. 더 줘야겠어.” 릭샤꾼은 두 배나 많은 요금을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나는 릭샤에서 내렸다. 그러나 내리는 나를 막아서며 그는 돈을 요구했다. 막아선 손을 뿌리치고 역까지 무작정 걸었다. “이봐 돈을 내!” “돈 냈어!” ”더 내!” “싫어!” ” 요금을 내라고!” 나는 끝내 참아 왔던 분노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코 앞까지 단숨에 달려가 소리쳤다. “ 닥쳐, 이 사기꾼!” 순화시켰다는 것만 알아주길. 이보다 더 거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동양의 찰진 욕을 들은 릭샤꾼은 더 이상 귀찮게 매달리지 않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기차는 예상대로 연착되어 느지막이 플랫폼에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나는 "병신들!" 구호를 외치며 씩씩거렸다.


짐꾸러미에서 과자를 꺼내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당이 충전되고 나니 거짓말처럼 분노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결코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와일드함을 넘어선 포악한 나의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오는 내내 벗겨지고 벗겨져 결국엔 완전히 발가벗겨지고 말았다.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한 것이다. 릭샤꾼에게는 아마도 성질 사나운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그때의 내 말과 행동들은 고유한 성향이라기 보단 인간의 본성에 가까웠다. 잘 포장되고 정제되어 있던 서울 생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날것이었다. 문득 겁이 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끔찍하게 두려운 것이었다. 껍데기로 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던 것일까? 어쩌면 유년시절로부터 지금까지 한 뼘도 자라나지 못한 어른 아이 일 거라고, 과자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좋은 옷과 풍족한 음식을 바라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채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사실들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손에 쥐어진 것을 토대로 평가하고 깔끔 떨기에만 바빴다. “얼굴이 왜 이래?” 이따금 거울을 보며 나를 부정하기도 했다. 여행 중 핼쑥해진 얼굴과 말라버린 몸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눈빛은 서울에서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를 마주 하는 일은 곧 나를 탐험하는 일이 되었다.


까탈스럽고 무지막지 예민했다. 음식을 가리고 위생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아이처럼 징징거렸다. 툭하면 겁을 집어 먹고 툭하면 으르렁거렸다. 무모하게 걸었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도움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사람을 좀처럼 믿지 못했다. 속 좁게 생각하며 나를 과대 포장했다. 그게 나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껍데기를 버리고 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로부터 나답게 다시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알을 깨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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