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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Oct 24. 2021

타이거 힐



길 위엔 나 혼자였다.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서 있었다. 미쳐버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나에게 대화를 건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고, 한 걸음 앞을 향해 내딛는 건 그보다 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해발 고도 2000m가 넘는 가파른 산 위의 마을 다르질링. 머릿속에 그 작은 산길을 떠올려 본다.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리듯 빛깔과 향기와 감정들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풍경을 완성해낸다.


시간은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배낭에 우산이 잘 걸려 있는지 여러 번 손으로 확인하며 길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흐렸고 마을은 서서히 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타이거 힐로 오르는 산길은 콘크리트로 잘 포장된 길이었다. 그것은 홀로 산을 오르는 이방인에게 더없이 사려 깊은 길이 되었다. 정상까지는 얼마나 남은 것일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오로지 꼭대기의 전망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작은 산길을 돌고 돌아 얼마간 비슷한 숲 속의 풍경이 반복되더니, 흙 위에 잡초가 무성한 진짜 산길이 시작되었다. 사람과 자동차가 지나가며 잘 눌러 놓은 자갈길을 따라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탁했고 사방이 연무로 가득해 앞을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점점 더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던 것이다. 별안간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투둑 투둑 길 위의 자갈들을 적시기 시작했다. 마을 어귀에서도 비는 한차례 쏟아졌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보단 주변이 빠르게 어두워지는 것이 걱정이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이미 한참을 올라와 버린 뒤였다. 산길의 초입에서 전망대로부터 내려오는 차량들, 연인들, 청년들을 몇 번 마주치긴 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우산을 쓰고 산을 오르는 이는 오직 나 혼자였다.


비는 조금씩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고 계속 나아갈 것인지 그쯤에서 하산할 것인지 운명의 9부 능선 위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여자, 스물넷, 여행객. 어둑한 밤 홀로 산속에 있다는 게 미친 짓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선뜻 발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더욱 날카롭고 뾰족해진 내 오기가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 무섭니? 너 돌아가고 싶은 거구나, 서울로.” 서울을 떠올리자 머릿속은 다시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취방에 책임과 의무와 반쪽짜리 꿈을 욱여넣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길로 곧장 인도로 도망쳐 온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번쩍!


떨어지는 날벼락에 놀라 몸이 얼어버렸다.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먹이사슬의 하층으로 떨어진 나는 본능적으로 산을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9부 능선에서 뜻하지 않은 후퇴를 맛보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을 벼락이 새하얗게 쓸어버린 것이다. 오로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뛰었다. 갈비뼈 아래가 욱신거리다 못해 칼로 도려내듯 아파왔다. 그대로 뛰다간 갈비뼈마저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뛰고 또 뛰었다. 손에 들고 있던 우산마저 내던져 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 하산하고 있었다.


쾅!


다시 한번 천둥이 내리쳤고 거기서부터는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한 나는 철퍼덕 쓰러졌다. 숨을 고르기조차 힘겨웠다. 옆구리가 너무 아팠다. 여행을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낯설고 지독한 울음소리였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너 이게 뭐니, 가오 빠지게. 나는 쓰러져 울면서도 자책하기를 잊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목에서 쉰 소리가 올라왔다.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눈물을 멈추었다. 천둥번개도 비도 얼마간 계속되었다. 울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다시 일어서 산길을 내려갔다. 짙은 어둠이 주위의 배경을 나로부터 싹 지워냈다. 나는 정말로 죽음 문턱에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터벅터벅 어둠 속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연옥으로부터 돌아온 탕자가 한참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산길을 따라 자동차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하느님, 신 봤다! 드디어 간절히 바라던 대로 신을 영접한 것이다. 작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어쩌면 신의 후광보다 더 경이로웠을지 모른다. 나는 유레카를 외치며 왼 팔을 가슴 높이로 치켜올렸다. 엄지를 척 세웠다. 인도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히치하이킹이다. 신은, 아니 자동차는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내 앞에 멈춰 섰다. 구원자의 뜻에 따라 자동차 뒷좌석 문을 잽싸게 열었다.


“헬로우-”


뭐든 저지르는 건 찰나의 순간이다. 나는 차에 올라타고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는 남자가 셋. 그들은 각각 검은색과 흰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떤 종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힌두교일 것이고 브라만 계급이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사제들 같아 보였다. 그들은 신이 보낸 메신저 거나 사탄이거나, 나는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밤에 왜 혼자 산에 있는 거예요?” 운전석의 신, 아니 메신저, 아니 남성이 물었다. 그는 매우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역시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머지 둘은 그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이 밤에 전망대는 왜 가려던 거예요?” “..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꼭대기를 보려고 올라간 거죠? 맙소사.” 그는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 그래서, 에베레스트는 봤어요?”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더 크게 웃었다. 그러나 비웃음이라 해도 탕자의 귀에는 사제들의 합창처럼 신성한 웃음소리였다.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기엔 너무 멀어요. 아침에 차를 타고 오르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야 해요. 위험해요.” 그는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았다. 나를 무사히 내려준 뒤 차량은 마을 어귀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선 채로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신을, 아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자동차가 눈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비탈길을 올랐다.


다르질링의 밤은 초겨울 저녁처럼 추웠다. 뜨거운 물 조차 나오지 않아 오밤중에 찬물로 냉수 샤워를 해야 했다. 몸의 감각을 망가트리는 차가운 물벼락을 맞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섰지만, 얼굴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울의 모서리로 힐끗 바라본 모습은 역시나였다. 눈두덩이 밑으로 눈물자국이 깊이 파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저질렀던 무모한 행동에 비하면 얼굴은 그리 못난 것도 아니었다.


두툼한 홀터넥 스웨터로 갈아 입고 커튼을 활짝 열어 창가에 걸터앉았다. 비탈진 산등성이에 촘촘히 불이 켜진 마을을 바라보며 타이거 힐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 없는 건 빠르게 포기. 도망치거나 빠져나가는 게 익숙한 미꾸라지. 꿈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달라던 극단주의자. 서울에서의 나는 그랬다. 인도에서는 그보다 더했고.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딱 하나 있긴 있었다.


용기.


여행을 거듭할수록 나는 조금씩 더 무모해졌다. 그 거침없는 걸음걸이와 와일드함이 좋았다. 약하게만 보였던 내가 뛰고,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나 자신을 회복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모습이다. 그래서 무모함으로 아주 끝장을 보고 싶었다. 오롯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정상에 우뚝 서는 용기를 보고 싶었다. 뒤돌아 하산하는 것이 싫었던 이유다. 만약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지 않았다면 나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벼락은 아마 신의 충고였을 것이다. “그쯤 해둬. 그 정도로 충분하잖아. 더 이상 너를 시험하지 마.”.


뒷날 눈을 뜨자마자 시내에 나가 지프를 아 탔다. 그리고  홀로 걸었던 타이거 힐을 지프를 타고 달렸다.  정상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분명 걸어서 올라갈  있는 길이었지만, 늦은 시간에 오르는  꿈도 꾸지 말아야  높이였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칸첸중가 바라보며 전망대에  있었다. 무모하고 거칠었던 어제의 산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운이 좋은 날에만   있다던  멀리 에베레스트의 꼭대기는 보아도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작았다. 수많은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와 다시  아래로 지프 없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림 같은 산맥을 바라보며 떠나온 날들을 하나   위에 얹어 보았다.


처음으로 델리에 도착했던 날, 북적이던 거리와 오토릭샤, 마살라의 맛, 배탈과 고열, 우다이푸르의 우체국, 잔시에서의 가위눌림, 타지마할과 바라나시, 릭샤꾼과의 한판 승부, 그리고 다르질링. 나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나를 모험했다. 서툴고 불완전했던 20대 청춘은 두려운 것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엔 나도 완벽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30대에도 여전히 나는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다. 삶에 대한 경외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용기를 깨달았지만,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끝을 모르는 모험일 뿐이다. 그날 그 걱정들을 산 언저리에 얹어 두고 왔더라면 어땠을까. 사막의 모래 아래에 묻어 두고 왔더라면. 갠지스 강가에 띄어 보낼걸 그랬다.


나는 모의고사를 망친 수험생처럼 풀지 못한 숙제만 잔뜩 떠안은 채 여전히 서울 땅에 꿋꿋이 발을 딛고 서 있다. 어제의 실수와 책임을 스스로 채점해가며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내일 해내야만 하는 일들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완벽’이라는 채찍은 내려놓았다. 사막에서 길을 만들어 나가던 낙타꾼처럼, 길이 없어도 나의 길을 만들어 나가며 하루라는 시간을 서툴게 완성해 나갈 뿐이다.


때로는 멍청하고 허술하지만 꿋꿋이 걸어 나아갈 때, 으슥한 산기슭에서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이번엔 신이 그곳에 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대로 척박한 길에 순응하며 고개를 높이 들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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