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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May 30. 2021

한 걸음, 한 걸음 더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는 말


숨 가쁘게 흘러가는

여기 도시의 소음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모든 것

놓치긴 아쉬워


잠깐 동안 멈춰 서서

머리 위 하늘을 봐

우리 지친 마음 조금은

쉴 수 있게 할 거야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복잡하지만은 않아


한창 시티팝에 빠졌을 때 즐겨 들었던 윤상 <한 걸음 더>의 가사다. 도입 부분의 색소폰 멜로디가 좋아 빠진 노래였는데, 정수는 노래 가사에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이 노래는 남들보다 한걸음 늦은, 그래서 앞으로 살아갈 날을 막막해하는 이들을 향한 위로를 담고 있었다. 늦어도 괜찮다고, 세상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고.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가사의 토씨 하나 바꿀 필요 없었다. 오늘날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도 동일한 위로를 주고 있었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또래들과 박자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스무 살의 겨울, 반수를 결심하면서부터다. 바닥난 학점과 헝클어진 대인관계를 청산해나가는 과정이 버거워 아예 갈아엎기로 마음먹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다시 피 말리는 입시판으로 몸을 던졌다. 일 년간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나오니 친구들은 군대에 가거나,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등 제 나이에 알맞은 높이의 계단을 착실하게 밟아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서 있었다. 나이만 두 살 더 먹은 새내기가 돼 있었다.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렸다. 종종 나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더 많은 동기도 있었지만, 이름 대신 형으로 불리는 순간이 많아졌다. 호칭이 변하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형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군대에서도 나는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나보다 어린 선임들에게 혼나고 나보다 어린 동기들과 티격태격 다투며 나이에 대한 고민은 깊이를 더해갔다. 전역 시기도 애매했던 탓에 예정보다 늦게 복학하게 됐다. 복학한 뒤로는 어딜 가든 최고령자가 되기 일쑤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곤 있지만 남들보다 늦었다는 사실이 날카롭게 찌르는 순간이 있다. 힘겹게 취업 전선을 뚫어낸 친구들을 볼 때 특히 그렇다. '너는 얼마씩 저축하니' '너도 주식 시작했니'와 같은 초년생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평범한 궤도에 오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나도 하루빨리 취업해 시시콜콜한 고민을 늘어놓고 싶은데. 하지만 그들은 쉽게 좁힐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아득히 먼 곳에서, 달리고 있었다.


얼마 전 한참 어린 동생들과 밥을 먹다 나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또래보다 대하기 편하다고.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은 처음엔 나이를 듣고 부담스러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무장을 해제했다. 대체로 둥글둥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냥 정신 연령이 어린 건지도 몰랐다. 뒤쳐진 채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이대로 적응해버린 건지도. 바짝 삭아버린 가면 뒤에는 내면의 성숙이 채 이뤄지지 않은 철없는 아이가 있었다. 자꾸 걸음이 느려지는 건 그 아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가도 그리 늦는 건 아니다. 하지만 두세 걸음 늦어지다 보면 마음은 바싹 타 들어가기 마련이다. 나중에 열심히 달려서 따라잡으면 되지, 처음에는 여유를 부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간격이 더 벌어지자 우울, 무기력과 같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좋은 핑계 중 하나였다. 그마저도 성에 안 찰 때는 꼭 정속으로 달려야 하냐는 식의 초연함으로 불안을 승화시키려고도 했다. 곧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라는 궁극의 가불기 뒤로 숨어버리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문득 과거의 한 순간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잊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 그 순간부터 더 자라지 못하고 성장이 멈춰버린 건 아닐까. '오랫동안 혼자서 간직해온 비밀 하나가 풀리면서 미옥의 소녀 시절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김연수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읽은 문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듯, 한 사람의 내면에 있어서도 성장판이 닫혀버리는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시절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그 시절은 언제 종말을 고할까. 그때는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어느 에세이의 제목이다. 윤상의 노래 가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 문구다. 한때 내 블로그 대문을 장식하기도 한.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말이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는 말은 끝내 꽃을 피워내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이들에게 무례한 말일지도, 낙오한 사람들이 느림을 찬양하며 알량한 위로를 찾는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이도 저도 아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아직도 몽우리 지지 못한 채 바람에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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