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가 힘든 이유는
드디어 내가 말할 차례다. 입을 열자마자 십수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준비한 말들은 한순간에 공중에 흩뿌려진다. 나는 단어들을 순서에 맞게 주워 담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어림없다. 천년 같은 침묵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ENTP가 나온다. 이중 E는 Extraversion의 약자로, 외향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어디 가서 외향적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아무리 봐도 나는 I(Introversion)인데. 성격 테스트는 자기가 갖고 싶은 성격을 보여준다는 말이 맞다. 소심한 성격이 죄는 아니지만 그로 인해 대인관계가 힘들어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특히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도망치고 싶어 진다. 이제 나이도 곧 스물일곱인데 아직도 말하는 게 어른스럽지 못하다. 더듬 투성이인 말들은 후회로만 남는다. 전문 용어로 학습된 실패라고 하나. 만남이 잦아질수록 자존감은 낮아지기만 한다. 이 글은 대인관계가 어려운 이유를 찾아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경험을 토대로 3가지 이유로 추려봤다.
나를 포함해 성격이 소심한 사람들은 주변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인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다고 볼 수 있지만 대게 고민 끝에 악수가 나온다.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모니터링한다. 그러다 보니 말도 더듬게 되고 제스처도 부자연스러워진다. 다른 사람들은 너에 대해 신경도 안 쓰니 걱정 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나부터 신경을 많이 쓴다.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실수를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기억한다. 나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그렇게 퍼즐 조각 끼우듯 맞춰간다. 그러다 보니 남들도 똑같이 나를 지켜볼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에게 보이고픈 모습을 혼자 상상하고 그에 맞게 말과 행동을 고치려 한다. 하지만 어설픈 연기는 금방 들통나게 되어있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은 아주 고통스럽다.
인간이 두려워 늘 벌벌 떨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언동에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갖지 못한 채 혼자만의 번민은 가슴 깊은 곳 작은 상자에 감춰 두고서,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기며 그저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척하며 저는 점점 익살스런 괴짜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오랜 친구들 앞에선 탁월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고,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 낯을 가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이 일관된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며,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변하는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둘 중 하나는 코스프레로 여긴다. 나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입이 트인다. 말실수가 잦다는 문제가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내 모습을 재밌어하고, 나도 그게 좋다. 첫 회식 자리가 기대되는 이유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다음날도 똑같이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니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미 '진짜 모습'을 들켰으니 소심한 모습을 어줍잖은 메소드 연기로 여긴다. 지킬 박사도, 술만 마시면 나타나는 하이드도 모두 내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말이다.
관계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중·고등학교 친구들, 군대 동기들과 끈끈해진 이유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겉모습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더 잘 알수록 그 사람을 더 신뢰하게 되며 한 번 신뢰가 싹튼 관계는 사소한 실수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말과 행동을 검열할 필요가 없기에 만남이 편해지고, 그래서 더 자주 만나게 된다. 밥 먹듯 관계를 망쳐버리는 나지만 그럼에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모두 기숙학교, 군대 등 좋든 싫든 매일 마주 보며 살아야 하는 곳에서 만난 인연들이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 주고 나를 이해해준. 관계는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사회로 나와서는 스스로를 증명할 시간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곧장 마음을 거둬들인다. 시간은 부족하고 굳이 저 사람 아니어도 세상엔 멀쩡한 사람이 많으니 당연한 이치다. 첫인상이 별로인 사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알기도 전에 관계가 끝나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남기는지도 알 것이다. 반복되는 관계의 단절은 안으로부터 마음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좋고 관계가 고프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관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상처 받을 걸 알면서도 다시 동아리 모집 공고를 훑게 된다.
노력으로 낮은 자존감을 극복했다는 이들의 수기를 들을 때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성격이 이 모양이라느니, 더 기다려달라느니 남 탓만 해왔던 건 아닐까. 하지만 마음가짐으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너 자신부터 사랑하라' 같은 조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요한 건 외적인 요소를 개선하는 일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낮은 자존감을 호소하는 글이 올라오면 헬스를 해보라는 답글이 빠짐없이 달린다. 외모지상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단단해지는 법을 말한 것이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가만히 앉아 징징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꿔보자.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믿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