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물리학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얼마 전 재밌는 댓글을 하나 읽었다. 제빵에 관한 유튜브 영상이었는데 한 전공자가 "대충 이런 원린데 자세히는 기억 안 난다"고 댓글을 남겼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를 진정한 전공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전공자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보이나 그게 정확히 뭔지는 기억 안 나는 사람'이었다. 평소 눈으로만 댓글을 읽는 편이지만, 그 댓글만큼은 '좋아요'를 꾹 눌러주었다.
물리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반응은 대게 이렇다. "오 정말 그럴 것 같이 생겼어요"라며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농담을 던지거나 평소 물리학에 대해 품었던 질문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한다. 후자의 경우 굉장히 난감할 때가 많다. 대충 이런 내용인 건 아는데,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려면 전문가 수준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빛이 입자예요, 파동이에요?"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합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입자성과 파동성을 뒷받침하는 실험을 나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한 번 더 왜라고 묻는다면 더는 해줄 말이 없다. 복잡한 이론을 수식 없이 풀어내는 데 있어 실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위 댓글러의 말마따나 방대한 전공의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도 못한다.
전공자의 한계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대학을 왜 다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함이다. 올해 초 물리학 전공자의 70% 이상이 전공과 관련 없는 직군에서 일하고 있다는 통계를 본 적 있다. 나도 전공을 살려 취업할 생각이 없다. 실력도 부족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님이랑 맞짱 뜨고 싶은 충동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표절 검사기에 걸리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표현을 돌려가며 레포트를 쓰는 일도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그렇다면 나와 저 70%의 사람들은 대학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학에서의 4년은 다양한 경험을 하며 꿈을 영점조절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고등학교 때 했어야 하지만 비정상적인 한국의 교육 체제는 그런 시간 낭비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때는 변리사가 되고 싶었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지금은 일 년 간 학보 활동을 하며 기자의 꿈을 갖게 됐다. 무슨 꿈이 그렇게 휙휙 바뀌냐고 생각한다면, 우리 나이에 무슨 경험을 해봤다고 제대로 꿈을 정할 수 있겠냐 되묻을 것이다. 아직 3학기나 남은 만큼 꿈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취업 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고민할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하지만 문제는 덩그러니 동떨어진 전공이다. 다른 직군을 선택하는 순간, 전공 공부에 대한 인내심은 바닥난다. 조금만 이해가 안 돼도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라는 현타가 밀려온다. 어차피 잊힐 거라면,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한 지식만 남을 거라면 나는 왜 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야 할까. 그 대신 원하는 분야에 시간을 더 투자할 순 없을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국에서 졸업장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요즘엔 추세가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는 순서가 정상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고졸 딱지를 극복하려면 현직자도 감탄할 만한 어마어마한 스펙이 필요하다. 그런 스펙이 고작 졸업장 한 장과 맞먹는다는 사실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나는 학부 졸업장과 준수한 학점이 어느 정도까진 그 사람의 실력과 성실함을 증명해주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다수의 학생이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갖게 되는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졸업 여부는 여러 평가 지표 중 하나로만 넣어도 충분하다. 수많은 학생이 돈과 시간을 절약할 것이며, 구직자의 질도 전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기업들이 먼저 졸업장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졸업을 하면 스물여덟 번째 여름을 맞는다. 소중한 내 20대는 대학 입시와 군 복무, 졸업장을 따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도 모두 취업을 준비하는데 써야 할지도 모른다. 전공과 상관없는 새로운 공부를 하며 말이다. 평생에 걸쳐 직업 훈련의 기회를 보장하는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너무 일찍 정해버린 꿈을 들고 남은 인생을 헤쳐나가야 한다. 꿈이 변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매우 크다. 대학을 떠나면 그마저의 기회도 없다. 졸업장의 무게가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청년들이 마음껏 경험을 쌓고 다시 한번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