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찰한테 붙잡힌 이유

배낭여행 중에 두 번이나

by 현우주


"우리한테 오는 거 같은데?"

"아닐 걸, 우리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근데 좀 큰 일인가 봐, 열 명은 돼 보이는데?"

"그러게... 경찰견도 데리고 나왔네"


먼바다 등댓불처럼 사방으로 흔들리던 손전등 불빛은 이내 우리의 얼굴 위에 포개졌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순식간에 대여섯 명 정도 되는 경찰관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전짓불 뒤로 얼핏 보이는 그들의 실루엣은 거대했다. 경찰견은 우리가 마시던 맥주캔에 코를 들이밀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두 동양인 청년을 앞에 두고 그들은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잔뜩 얼어붙은 우리의 어깨 위로 눈이 쌓여갔다. 마침내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러시아가 핫한 여행지로 뜨기 전, 나는 중학교 동창 한 명과 러시아 여행을 갔다. 2주에 걸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을 차례로 여행하는 코스였다. 이 두 도시는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에 밀려 주목받지 못한 도시들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들이 공산권 국가로 여행한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저렴한 항공권과 물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여행의 이유는 이걸로 충분했다. 실제로 총 여행 경비는 100만 원 안팎이었다. 2주간의 여행이었는데도 말이다.


러시아 산타 데드 모로즈(Ded Moroz)


"여기서 내리라고?"

"이거 미끄러지면 죽겠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비행기와 공항을 연결해주는 통로는 오지 않았다. 대신 가파른 계단이 우리를 맞았다. 영하 이십 도의 날씨. 완전 무장을 했지만 파고드는 찬 공기는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설렌 마음은 추위도 잊게 했다. 앞으로 14일. 우리는 완전히 자유였다. 간단한 입국 수속을 끝낸 뒤 공항 밖으로 나왔다. 이제 하바롭스크 시내로 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문제에 봉착했다. 버스를 언제, 어디서 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버스 정류장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옆에서 뭔가를 기다리는 러시아 노부부에게 무작정 '버스'를 외쳐댔다.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조그마한 마을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와 마주쳤다. 버스비는 고작 20루블(440원) 언저리인데 우리의 수중엔 고액 화폐밖에 없었다. 원화로 비유하자면 몇 백원을 내야 하는데 5만 원권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승무원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승객들로부터 거스름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행히 착한 러시아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요금을 치를 수 있었다. 마침내 시내에 도착했을 땐 체력이 전부 방전된 상태였다. 일주일 간 머물 숙소를 잡았다. 덩치가 장롱만 한 아저씨가 운영하는 작은 에어비엔비였다. 그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듯한 이불 안에서 뒹굴거렸다. 힘들었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첫날은 좀처럼 잊기 힘들다. 낯선 곳에서 순식간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하는 까닭이다. 첫날을 제외한 여정은 대부분 몇몇 조각난 장면으로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 어떤 해프닝은 수년이 지난 뒤에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는다. 책을 읽는 이유가 인생을 바꿀 한 줄의 문장을 건지기 위함이라면 여행을 하는 이유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기 위함이리라. 러시아 경찰한테 붙잡힌 일도 그중 하나였다.


하바롭스크 우스펜스키 대성당


눈발이 제법 거세게 날린 날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숙소 앞 공터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곧 러시아 경찰들에게 둘러싸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채 (...) 마침내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예상외로 따듯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듣다 보니 영어였다. 발음이 상당히 뭉개진.


일단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여권을 내밀었다. 우리는 신원이 보장된 사람이라는 나름의 의사표시였다. 당시 나는 러시아를 위험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밀입국, 마피아, 여러 범죄가 들끓는 나라. 그런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으름장이었다. 여권을 대강 훑어본 대장은 조용히 맥주캔을 들어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버렸다. 알고 보니 러시아에선 공공장소에서 음주하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그뿐이었다.


블라디보스톡 레닌공원에서 또 한 번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번엔 무단횡단을 하다가. 공원 입구 초소에서 근무하던 경찰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운이 지지리도 없지. 그는 들어오라고 손짓한 뒤 우리의 휴대폰을 달라 했다. 그가 어떤 번호를 누르니 이상한 바코드가 나타났다. 바코드를 찍으며 그는 우리가 벌금 500루블을 내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출국을 하고 심지어 일회용 유심칩을 버리는 순간에도 벌금을 내라고 하는 연락이 없었다. 지금도 그 바코드의 정체가 궁금하기만 하다.




"다음은 어디 개척하러 갈까"

"몰라, 중동 지역은 어때"


혹한의 러시아에서 살아 돌아와 의기양양해진 두 동양인 청년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다음 목적지를 고민했다. 물론 둘 다 입대하고, 뒤이어 바이러스가 창궐해 여행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다시 떠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고생은 젊었을 때나 사서 하는 거라고. 나이가 들수록 더 편한 여행지를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어디가 될 진 모르지만, 그곳에서도 평생토록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 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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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경제부 직업 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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