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Jan 23. 2022

소설<알쏭당>

냄새

일본에서 넘어왔다는 신문물은 종합상가의 소우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행선의 축소판이었다. 음식점 대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고 슈퍼마켓 대신 식료품을 사는 게 가능했으며 출퇴근 길에 들려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동네의 작은 카페 같은 곳이었다. 행여 부부 싸움이라도 크게 하고 나면 전에 못 느끼던 집의 차가운 공기를 느낀 중년의 가장들이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찾아가는 곳도 편의점이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편의상 찾는 곳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편했는지 별일 없어도 그냥 한번 들르는 장소였다. 동네 아이들에게는 수영 강습이 끝나면 락스 냄새가 덜 빠진 젖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제일 먼저 달려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대형 종이컵에 탄산음료를 얼음과 함께 양껏 마실 수 있었고 얼음과 주스가 합쳐 저 슬러쉬라는 불리는 거품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슬러쉬의 색깔은 보라색, 노란색, 연녹색으로 다채로웠고 직접 기계를 작동하면 원하는 만큼의 슬러쉬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 나왔다. 구름 모양의 거품은 커다란 종이컵을 벌써 다 채우고 흘러내렸고 아이들은 최대한 종이컵에 거품을 요령껏 담는 노력을 해야 했다. 가끔은 기계에 넘쳐나는 슬러쉬 거품을 뭐라 하는 편의점 직원의 꾸지람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혀를 짓궂게 날름거리며 흘러내리는 거품을 빨아먹었다. 아이들은 냉장고에 진열된 캔음료 보다 직접 따라 마시는 걸프와 슬러쉬를 더 좋아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외모의 음료였고 무엇보다 얼음의 양과 음료의 양을 내가 결정할 수 있어서였다. 아이들은 물속 운동에 지쳐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것인지 슬러쉬를 좀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수영을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모두 물속에서 팔을 휘젓을 때마다 겨드랑이 사이로 보이는 수영장의 둥근 천장을 보면서 뭉게뭉게 피어 나오는 보라색 슬러쉬를 강습 내내 떠올렸다.


"어, 하하, 우리 동네 애들은 아마 수영을 거진 꽤 할걸~나도 수상인명구조 자격증 있어~"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는 그런 거? 야~너 그럼 물에서 막 그냥 떠있을 수 있는 거지? 우리 애들도 그냥 물에서 둥둥 떠있더라~첫째가 어릴 때부터 수영을 그렇게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고"

평생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내심 아이들에게만큼은 자신이 못해본 것들을 원 없이 시켜주고 싶다는 본심을 드러냈다. 사무실에서 '공주'선배가 형을 애처가로 부르자 장 팀장이 언제나 그랬든 거들며 한 말이 떠올랐다.

"제수씨는 신형 외제차를 끌고 다니라 하고, 쟨 국산 똥차 끌고 다니잖아~연식이 2002년식이지?"

장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상 담배 타임의 여왕인 선배가 한마디 했다.

"야~주 수입원이 너인데 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할 거야? 내가 보기엔 쟨 공처가야~"

그녀의 말에 동조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다. 형원이 형은 사람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상기하며 방금 전에 그가 물었던 교통사고의 예를 떠올리니 조금은 그를 알 것만 같았다. 

"형~여기 호텔에 수영장 있던데~ 낼 아침 조식하기 전에 수영 어때? 운동하고 조식 딱~?"

그에게 나도 무언가를 가르칠 게 생겼다는 반가움이었을까, 발견의 기쁨에 가까울 수 도 있었다. 계획에도 없던 아침 수영을 제안했다. 마침 장 팀장은 여행지가 동남아이고 혹시 모르니 수영복을 챙기라고 공지를 한 상태였다.

"수영? 야~ 나 수영 전혀 못해~하하"

사무실 한구석에 나를 몰아세우고 여행지를 선택하라고 겁박하듯 말하던 형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더욱 몰아세웠다.

"형~나 자격증 있다니깐! 걱정 마~ 내가 알려줄게~하하"

"얘 왜 이래.. 사무실에서는... "

사무실에서는 조용한 놈이 여행 와서는 참 활기가 넘친다는 말을 하려다 그것조차 잔소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마지못해 말을 거둬들이는 것 같았다.

"호텔 프런트에서 8시 반에 모이기로 했으니 낼 7시에 일어나서 수영하고 조식 먹어요~콜?"

"그래~낼 아침에 몇 시에 모인다고 했지?"

얘 왜 이래 하는 특유의 영문 모를 표정과 자식~알았어하는 호탕한 형님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그는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에서 알람을 맞추고 침대로 몸을 뉘었다. 우리의 대화는 돌고 돌아 아침 운동을 약속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매듭짓고 밀려오는 여행 첫날의 피로를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최면에 걸리듯 곯아떨어졌다.

"야~!"

이제는 귀에 익숙한 천장을 뚫을 기세의 두성의 목소리가 좁은 호텔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일으켜 세우자 이른 아침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생생한 한 남자가 삼각 수영복 하나만 걸친 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형.. 누가 야외 수영장에서 삼각 팬츠를 입어... 그거 팬티 아니지?..."

"야~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7시야~빨리 수영하고 밥 먹자~!"

장 팀장 말마따나 형은 여행지에 오면 평소보다 더 부지런해진다고 했는데 여행 첫날밤의 나른한 해방감은 온전히 나만의 것인 양 형은 평소와 변함없이 당장이라도 고객을 만나러 갈 사람처럼 단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 건물 뒤편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야외 수영장은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흰색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 한 명과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텅 빈 썬베드뿐이었다. 

"다이빙할 수 있어??"

오랜 시간, 성실함으로 공 들여 만들어진 것 같은 역삼각형의 다부진 근육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목소리로 그가 말하는 순간 해 본 지 꽤 오래된 다이빙을 무슨 연유인지 거리낌 없이 시도하려 자세를 잡았다.

발끝을 물과 수영장의 경계선 위에 가지런히 딛고 손가락을 발끝에 열 맞추며 상체를 구부렸다. 갑작스레 처음 다이빙을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물에 입수하자마자 조금이라도 늦게 고개를 들면 수영장 바닥에 코를 내리 찧을 거라는 선생님의 말을 무시한 체 겁 없이 뛰어들었다가 피 묻은 코를 틀어쥐고 올라왔던 기억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첨벙~!!"

불현듯 떠오른 코피의 기억이 몸을 움츠러들게 한 것일까, 허벅지와 종아리에 힘을 주어 용수철처럼 뛰어올라 허공에서 한번 몸을 구부리고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물속으로 처박듯이 들어가야 했는데 그만 머리가 아닌 배로 물을 맞이하는 소리가 수영장을 뒤엎었다. 

" 하하하"

그리고 두성만큼이나 자주 듣던 웃음소리도 함께 형은 배를 부여잡고 물기도 없는 수영장 바닥에 널브러져 웃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