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일을 내 손으로 다 내려놓으니 우울감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온갖 증상들로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운전은커녕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제일 처음 응급실을 갔던 날, 죽을 먹고 체한 기억이 계속 생각나 음식을 먹는 것도 불안했다.
공포감에 집에 혼자 있는 것도 힘들고
하루 종일 멍하니 있거나 울거나
3일 내내 10분도 못 자기도 하고 애들 챙길 때, 등원 하원 할 때 잠깐 집 앞에 나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24시간 지속되는 증상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폐소공포증, 대인기피증, 광장공포증, 범불안장애, 재앙화사고, 건강염려증 등 일상의 모든 요소들이 불안이었고 자극이었다.
가족들은 심각하게 상의를 했다.
이 상태로 두면 안될 거 같은데, 아이들도 케어가 제대로 안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충청도에 있는 고모 쪽으로 이사를 가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도 나왔다. 아빠도 재혼을 하셔서 당장 그쪽으로는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잠시 위탁하고 병원이나 시설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고려를 했을 정도였는데 내가 그건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이사도 절대 안 가겠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이사는 단순히 지역 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지역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싫었다.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도 알아봐야 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학부모들. 정상적인 멘털로도 쉽지 않은 상황을 온전치 않은 상태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내가 나아질 수도 없는데 이사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익숙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불안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절대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회피하지 않을 거야 라는 무언의 다짐이 있었다. 이 상태로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기대서 이사를 하게 되면 난 평생 그렇게 살아야 될 것만 같았다. 정말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또다시 엄마가 생각났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이던 엄마가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로 집이 아닌 외할머니 집으로 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빠도 결혼한 동생도 나를 돌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 고모 쪽으로 가라는 말에 버림받은 감정이 들었다. 물론 아빠와 동생이 옆에 같이 있어주진 못해도 물질적인,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면에는 자꾸 엄마의 기억과 오버랩되어 괴로웠다. 괴로운 감정 안에는 미안함이 깊게 남아있었다.
그럼 내가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어지러움 전문 병원에서 받은 전정재활운동을 하루에 수천번씩 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생활반경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정말 살기 위해서 했던 거 같다. 매일 큐티와 찬양, 기도는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의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평소 1년에 감기 한번 걸릴까 말까 하던 내가 죽을 만큼 아파보니 얼마나 건강을 안 챙기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고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감사의 이유를 찾게 하셨고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침에 눈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먹고 자고 볼 수 있고 걸어 다닐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아이들하고 같이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소식을 듣고 친구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인들, 해외에 있는 지인들도 걱정해 주시며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고
하지만 지속되는 증상에 그 감사도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끊임없는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017년 연말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