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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 낙서

벌레와 나

오늘, 낙서

by 감정 PD 푸른뮤즈

베란다에 개밋과 벌레 한 마리가 뽈뽈 기어 다닌다.

뭐에 취했는지 이미 느릿느릿하다.

그냥 놔둬도 죽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안 죽으면 어쩌지?'

섬뜩한 걱정이다. 안 죽으면 어떡하냐니?


그럴 만도 하다. 내 입장에서 이미 집 안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를 놓치면

금방 집단화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스프레이형 벌레 약을 조심스레 집고 벌레 가까이에 다가갔다.

벌레를 보며 쭈그려 앉았다. 가만히 보다가 벌레를 향해 약을 뿌렸다.

놀란 벌레는 버둥거리기 시작할 뿐 죽지 않는다.

'이 약으로 안 죽는 벌레인가?'


나는 더 열심히 뿌리고 벌레는 더 열심히 버둥거린다.

죽여야 하는 자와 살려는 벌레의 싸움이 시작됐다.

물론, 이미 승기를 잡은 건 내 쪽일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내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점점 지쳐가는 게 보이지만,

죽은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될 것 같아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벌레는 엉금엉금 기다가 철퍼덕 옆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기어간다.


베란다 타일 홈은 죽어가는 벌레에겐 높은 턱이다.

힘들게 타일을 올라가는 벌레를 지긋이 지켜보는데,

문득 무얼 위해 이렇게 열심히 기어갈까 의문이 든다.


어차피 곧 죽을 텐데....

갈 곳도 없고, 간다 해도 죽을 텐데.

아무 소용없는 걸음을 왜 이리 열심히 걸을까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벌레를

집중해서 보다 보니 순간 너무 미안해진다.


나도 어쩔 수 없고,

너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왠지 미안해진다.


틱, 틱

약 때문인지

벌레 날개 쪽에서 틱틱 소리가 난다.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미안해. 그래도 죽어야 돼.


잔혹한 싸움은 꽤 길게 이어졌고, 반전 없이 나는 이겼다.

승리의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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