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입문러의 [글쓰기연습장]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데, 어릴 적 그 흔한 백일장을 포함한 글쓰기 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글을 잘 쓴다는 인정을 딱히 받은 적도 없다. 글을 쓰지 않는 주변 지인들한테 몇 번 ‘너 잘 쓴다’는 우정 어린 응원이 전부다.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인정을 받은 적은 없다.
어쩌다 에세이가 쓰고 싶다고 이렇게 끙끙 대고 있는 걸까?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마음먹은 지 한 3년 정도 됐다. 당시 에세이는 특별한 경험이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딱히 쓸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있다 해도 반성, 자책, 후회와 미련투성이 일기위주로 글을 많이 써서 그런지 글이 다소 어둡고 우울했다. 내가 에세이를 쓴다는 건 우울을 전파하는 꼴이었다. 결혼하고 내 글을 읽은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 글은 좀 우울해.”
워낙 밝고 즐거운 글을 좋아하는 남편의 성향도 있지만,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끄덕였다.
점차 글쓰기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글의 톤 앤 매너도 다양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내 글도 튀지 않고 적당히 묻힐 것 같았다. 게다가 2020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감정의 분출 통로가 절실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실넘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잊고 있던 감정, 방황했던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각각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어떨 땐 상징적인 글로, 어떨 땐 낙서로, 어떨 땐 그림으로.. 저마다의 모양이 만들어졌다. 평범하기 짝이 없어 쓸 말이 없다는 말로 내팽개쳤던 이야기를 나는 쏟아내고 있었다.
물론, 욕구만 왕성했지 여전히 내 글은 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기에 머무는 글이든, 아니든 상념들을 뱉어내며 나는 조금씩 안정감을 느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행위이자,
무의식에 깔린 감정을 의식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이것은 결국 자기 치유와 맞물려 있다. 글쓰기는 결국 자기 치유적 행위다. 난 ‘치유’라는 단어에 매료됐다.
자기 치유만을 목적으로 글을 써선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치유 없이 글쓰기가 가능한가?
글쓰기는 자기 치유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또 누군가가 치유를 받는 상호보완적 관계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자, 내 투정받았어? 이제 네 투정받을게.’
이런 마음이었달까.
결국 내가 에세이를 쓰고 싶은 건
위로받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각양각색의 실로 얼기설기 엮어 좋아하는 상자에 담아놓고 너도 보고 나도 보며 또다시 쓸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 위로, 자기 성장과 맞닿아있다는 걸 에세이를 쓰고부터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