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추억여행 중
'자판기 커피를 내밀어 그 속에 감춰온 내 맘을 담아'
노래 가사가 하루종일 맴돈다. 2001년 발매 곡 토이의 <좋은 사람> 가사 중 일부다.
노랫말 속 주인공은 힘든 짝사랑을 토로하는데 나는 한 단어에 꽂혀 머문다.
'자판기 커피'
간혹 오래된 식당 한 구석에 낡은 자판기가 여전히 건재하건만, 존재감은 예전만 못하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자판기 커피 한잔은 흔한 일상이었다. 추운 겨울날, 지하철을 기다리며 마시는 따뜻한 코코아나 율무차 한 잔,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쉬면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은 일상 속 쉼표 같았다.
오래된 노래 한 곡을 우연히 들으며 나는 홀로 추억 여행을 떠난다.
고3시절, 6개월 넘게 짝사랑하던 사람과 같은 독서실을 다녔다.
"잠깐 커피 한 잔 하지 않을래?"
힘들게 공부하다가 마시는 커피는 그때도 생명수이자,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다.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없는 무적의 제안이었다. 그 핑계로 오붓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 남짓. 종이컵에 2/3 정도 담긴 커피 양만큼 짧지만 달콤한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커피 양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제일 큰 사이즈를 마셨겠지. 재수생이던 그 사람은 야속할 만큼 커피를 다 마시면 칼같이 자리에 돌아가 열공을 했다.
"오늘은 진짜 열심히 공부할 거야. 말리지 마!"
대학생 시절, 시험을 앞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책을 바리바리 싸서 친구와 도서관에 가지만, 엉덩이는 솜털처럼 가볍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 등을 툭툭 친다. 연습장에 슥슥 적어 친구에게 내민다.
'커피 한잔만 먹고 할까?'
잠깐 쉴까? 와 같은 말인데도 왠지 이렇게 말하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커피 한잔씩 들고 도서관 벤치에 앉아 '공부하기 싫어' '날씨 좋다' 툴툴 거리며 신세한탄을 했다. 물론, 진짜 '커피 한잔만'하고 공부하지 않은 건 당연지사다. 서로 눈빛교환 후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20대 초, 연애 초반 어느 날 남자친구가 제안했다.
"1000원으로 할 수 있는 데이트가 있는 데 할래?"
뭐, 연애 초반에 어떤 데이트인들 안 좋을까. 선선한 여름. 노을이 생길 듯 말 듯 한 시간. 우린 탄천 길을 산책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자판기가 있고, 주위를 벤치가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서 남자 친구 발걸음이 멈췄다. 자판기 커피 2잔을 뽑아 내민다.
"1000원도 안 들었다."
뿌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 친구와 한동안 웃었다. 그 뒤로 1시간 넘게 산책을 했다. 그땐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풋풋한 낭만은 그때가 유일했다. 잊고 싶은 연애라 이후 머릿속의 지우개로 몽땅 지웠지만, 그 기억 하나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자판기 커피는 좋아하는 이성과 잠깐 대화를 나눌 좋은 계기였다. 커피는 마시고 싶은데 동전이 없다는 어필과 함께, "동전 좀 빌려줄 수 있을까?"로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커피를 얻어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날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또 커피 한잔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적어도 2번은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으니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짝사랑인가 싶다. (나만 그랬나?)
주로 공원 벤치나 놀이터에 앉아 마셨던 것 같다. 친구와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왠지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다 마신 지 한참 된 빈 종이컵을 입으로 물고, 손으로 구기면서 참 긴 대화를 나눴다. 슬픈 일이 있던 날, 커피를 마시다가, 눈물이 또르르 한 방울 커피 위로 뚝 떨어졌던 적도 있다. 그게 왠지 더 서러워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던 날도 있다.
지금과 다른 감성이 분명 그 시절 자판기에 있었다. 내 낭만이 한 움큼 섞인 자판기 커피는 이제 낡은 추억이 됐다. 사람들은 이제 자판기를 찾지 않는다. 그 자리를 아메리카노가 차지한 지 오래다.
이제 가끔 자판기를 발견해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추억에 찬물을 끼얹듯, 커피 자판기의 위생도 외면하기 힘든 문제가 됐다. 하긴, 이젠 아무리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벤치에서 마셔도 그 기분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자판기 커피,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리운 그 시절을 호출하는 역할 뿐일지도.
노래 속 주인공은 힘든 짝사랑 중이다. 마음을 숨긴 채,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내미는 모습을 상상하며 예전의 나를 본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 낡은 추억을 곱씹을 것 같다.
"커피 한 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