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다
컵에 반쯤 담긴 물을 보며 말을 한다.
1. 벌써 반이나 없네.
2. 아직 반이나 남았네.
사람마다 상황을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하다. 나는 1번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1번처럼 해석하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시간이라는 한정적인 자원을 더 소중히 여기고 열정적으로 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
반쯤 남은 컵을 보며 늘 부정적이었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쪽이었다. 나이를 탓하고, 시간에 쫓겼다. 조급했고 자책하기 바빴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행복하다고 외치는 한편, 정작 해야 할 일에 압박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몰입하지 못하니, 결과물도 지지부진했다.
연말마다 두 가지 행위를 습관처럼 한다.
첫째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12월 31일마다 일기를 쓰고, 둘째는 각종 연예대상, 연기대상을 시청한다.
12월 31일 일기는 20년 넘은 습관이다.
보통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한 시간 전부터 쓴다.
1년을 무사히(?) 보낸 나를 위로하는, 일종의 편지랄까
의도는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주로 자책, 후회, 반성, 자괴감, 한탄으로 페이지가 꽉 찬다.
올해 무엇을 했나?
이럴 거면 차라리 뭐라도 하지..
이것저것 욕심내다가 아무것도 못했잖아.
또 한 살 먹었네. 점점 나이를 먹는 게 두렵다.
내년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대충 이런 식이다. 간혹 조금 희망적인, 조금 밝은 내용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어둡다.
이 정도면 일기보다 반성문에 가깝다.
두 번째는 3사 연기대상, 연예대상을 시청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연말이 되면 우리 가족은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먹으며 '이번엔 누가 대상이네, 아니네' 도란도란 얘기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 추억 때문인지 왠지 이제 한 해를 보내는 의식 같다.
2023년 MBC 연예대상은 1년 동안 가장 이슈를 많이 만든 '기안 84'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다. '어차피 대상은 기안'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최초로 비 연예인인 기안 84가 대상을 정말 타게 될 것인가에 시선을 모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니 응원도 보낼 겸 챙겨봤다. 예상했던 대로 기안 84가 대상을 탔지만, 그날 연예대상이 끝난 후 뇌리에 남은 건 대상후보였던 유재석의 인터뷰였다.
"올해 안된다? 내년에 하면 된다.
내년에 안된다? 그다음 해에 하면 돼요.
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SBS연예대상> 유재석 인터뷰 중-
덤덤히 다음 해를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마음을 '툭' 건드린 순간이었다. 평생 쓸 돈을 다 벌고, 누릴 유명세를 다 누린 그와 비교선상에 둘 순 없지만,
그의 말처럼 '그래 내년에는 타겠지' 할 수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걸 누가 장담할까.
이제 그의 나이 52.
올라갈 땐 힘들어도 내려올 땐 한 순간인 연예계에서
그가 언제까지 정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23년 이후로 두 번 다시 대상을 못탈 수도 있다. 당연한 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런 전제하에 그의 인터뷰는
대상19번이 나의 한계일 수 있고, 인기도 이미 끝났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내년에, 내년이 안되면 또 그다음 해에 도전할 것이다라는 강한 의지였다.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저 말을 누가 했든 상관없이
오롯이 저 대사에만 집중해 본다.
'나는 아직 시간이 있다'
저 당연한 말이 난 왜 이렇게 와 닿을까?
그런 의지를 가져본 적이 있던가?
지나간 시간만 너무 크게 본 건 아닐까?
언제부터 이렇게 결과만 집착하는 사람이 된 걸까?
아직 시간은 많다. 시간의 질이 다르지만 분명 많이 남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여유를 품는다.
지나온 세월이 길게 느껴지고 많은 것을 놓친 기분도 들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이 남았으니까.
계획한 대로 올해를 열심히 살고,
그래도 안되면 내년,
그래도 안되면 또 다음 해,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든, 반 밖에 안 남았든
어차피 나는 해야 하니까.
결과를 맺는 어느 날,
더 크게 환호할 수 있기를.
올해 12월 31일 일기는
자책보다 희망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