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운동 ing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일주일을 노트북 하나 쥐어주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면 행복할 사람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덕에 책상에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도 좋다. 활동적이거나 운동이 취미인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부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따라 해 보겠노라고 몇 번을 시도했다가 실패를 맛보고 '운동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만 찾았다.
그럼에도 끈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미련이 많은 탓이다.
'처음부터 운동이 맞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운동이 습관 되는 게 어디 쉽나.'
스스로 많이 달랬다. 의욕이 솟구쳤다가, 합리화를 했다가, 맞는 운동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때려치웠다가 반복의 세월이었다. 여전히 운동 습관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운동 도전 실패담 기록이랄까.
작심삼일이든, 작심일일이든 끈질기게 도전하는 이유는 40대가 되고 근육량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단 며칠만 활동량이 줄어도 근육량 변화는 요동친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단지 '살을 빼기 위해' '멋진 몸매를 만들기 위해'라는 목적이 아닌, 진정 '생존'을 위한 운동이 필요한 순간을 체감했다.
사실 생존 운동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됐을 뿐이다. 골격근, 기초대사량, 근육량률 부족과 체지방률 감소 등 실제 건강 문제들이 속속 나타났다. 무엇보다 '무릎과 허리 통증'이 준 여파가 컸다. 무릎을 다친 적이 있는데 쉬이 낫지 않았다. 별로 크게 부딪힌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잘 낫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유리 몸뚱이가 짜증 나서 의사 선생님한테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 데 왜 낫질 않을까요?"
적당한 위로와 격려를 바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정도면 크게 다친 게 맞다고, 원래 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는 데...
"아, 무릎에도 근육이 있는데 근육이 없어서 그래요.
무릎 근육은 다칠 때 쿠션 역할을 해주는데, 그게 없네요."
아.. 방심하다가 팩폭을 당했다. 현타가 왔다. 무릎에 근육이 있는지 평생 모르고 살았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서도 무릎근육 필요성은 들은 적이 없다(관심이 없었으니까). 의사 선생님 팩폭은 끝나지 않았다. 관절에 무리가 안 가려면 1kg이라도 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난생처음 다이어트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허리디스크도 문제다. 2020년 코로나 발발 이후, 활동량이 급격히 줄고, 침대에 앉아 베드테이블을 펴놓고 몇 시간씩 앉아 있던 게 화근이었다. (푹신한 침대나 소파에 오래 앉아있으면 척추가 눌린다고 한다) 검사를 해보니 골반도 심하게 틀어졌다. 결국 척추협착증을 진단받고 처음 알았다. 허리 통증이 삶의 질을 얼마나 낮추는지. 처음엔 통증이 너무 심해서 10분만 앉아있어도 통증 때문에 벌떡 일어났다. 서 있어도 아프고, 심지어 자려고 누워있어도 통증이 있었다. 앉든지, 눕든지, 서 있든지.. 뭐든 하나는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상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건지 와닿았다. 평범한 일상생활도 쉽지 않았다.
인생, 대충 살다 가면 되지 않냐고 외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살려면 운동을 해야겠구나'
깨달음은 단전 깊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사람이 안 바뀐다고 누가 그러던가. 아니다. 공포를 느끼면 바뀐다. 그것도 노력 없이 저절로 바뀔 수도 있다. 심각한 허리통증으로 병원에 다녀온 그날 이후, 평생 바꿀 수 없던 다리꼬기 습관을 한 번에 없애버리는 기적을 행했다. 역시 못하는 건 없다. '똑바로 누워서 어떻게 잠을 자?' 라던 생각은, '잠이 오든 안 오든 닥치고 똑바로 누워있어!'라는 생각이 이겼다. 처음엔 너무 낯설어서 뒤척이고 잠을 못 이뤘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 이제 똑바로 누워 자는 게 당연하다. 침대에 누워 도수선생님이 가르쳐준 스트레칭 동작을 하면서 결심했다.
운동을 시작하자.
실제 통증이 나타나고, 눈으로 몸의 심각성까지 보고 나니,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데 단 3초면 됐다. '가기 귀찮은데.. 갈까 말까.' 같은 게으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고 싶든 안 가고 싶든, 귀찮든 안 귀찮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이 들었다. '닥치고 운동'이다.
'왜 위험 신호를 본 후에야 몸을 돌볼까.'
한심한 생각이 들다가 나 자신이 안쓰러워 다독였다.
'이렇게라도 시작하는 게 어디야. 괜찮아.'
운동과 담을 쌓던 삶과 결별했지만, 운동의 목적이 생존인 만큼 두 손 불끈 쥐고 하지는 않을 거다. 생존 운동은 말 그대로 가늘고 길게 가는 게 목표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은 조금만 해도 미약한 변화가 보였다.
원래 잘하던 사람이 더 잘하는 건 힘들어도, 아예 못하던 사람은 조금만 잘해도 티가 나는 그런 효과랄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존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말 너무 뻔한, 당연한 이유로. 운동 습관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운동이 왜 재밌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존운동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거 하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