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운동 ing
휴일 저녁 대화.
"오늘 저녁 먹고 한 바퀴 뛰고 올까?"
"그래."
순간 깜짝 놀랐다. 이거 우리 대화 맞아?
"이런 대화를 한다니 놀라운데?"
"해보니 별로 어렵지 않은 걸 알게 된 거지."
부드러운 대화와 달리, 운동복을 주섬주섬, 손수건 하나 손목에 꽉 묶고, 운동화를 신고 전투적으로 나간다.
생전처음 달리기가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순간이다.
생존운동을 내 식대로 정의하면, 순도 100% '생존'을 목적으로 최소한의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발버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생존운동 = 달리기?'라는 공식은 매우 낯설다. 그렇다. 달리기는 나와 거리가 아주 먼 운동이었다. 생존운동 후보에 달리기는 없었다. 물론, 뛴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동네 한 바퀴 산책하면서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들어오는 수준이 전부다. 아직 달리기보다는 느긋한 조깅에 가깝지만, 달리기로 노선을 돌리게 된 까닭을 생각해 보면, 갑자기는 아니다.
어릴 땐 꽤 달리는 걸 좋아했다. 달리기는 바람을 가르고 사람들을 제치면서 '알고 보면 나는 초능력자였을지도 몰라' 라며 즐거운 착각에 빠지는 일종의 놀이였다. 신호등 앞에서 혼자 부릉부릉 시동을 걸다가 파란불이 켜지면 마구 뛰었다. 횡단보도를 달려 건너편 인도에 1등으로 도착하면 혼자 뿌듯했다. 즐겁던 놀이가 피하고 싶은 행위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점점 뛰기보다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난 언제부터 안 뛴 걸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라 시기는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뛰기 싫어서 버스나 지하철을 보내고 다음을 기다리는게 더 익숙했다. 뛰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 됐다. 왜 뛰지? 그것도 모자라 뛰는 게 즐겁단다.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났다.
나랑 다른 종족이라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안 뛴 이유 답은 더 단순하다.
힘드니까.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에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뛰는 건 그나마 익숙해졌지만, 야외에서 뛰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달리기는 달릴 만한 장소가 마련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달릴 수 있는 하천이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번거로웠다. 달리기를 안 하는 게 아니라, 환경 때문에 못한다는 핑계는 편했다. 울퉁불퉁한 인도는 내 기준에서 달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간혹 그 험난한 일을 하는 동네 주민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관심 밖이었다. 그들도 그저 다른 종족일 뿐이니까. 그런데 내가! 그 울퉁불퉁한 인도를 뛰기 시작했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뛰다 보니 알았다. 우리 동네 인도에 달릴 수 있는 길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안 보면 모른다. 봐야 보인다.......)
우리만의 출발선까지 슬슬 걸었다. 출발 지점에 도착하면 몸 풀듯 아주 천천히, 가볍게 발을 구른다. 호흡을내쉰다. 100미터, 200미터.. 얼마나 뛰었을까. 다시 걷는다. 겨우 20분 정도지만, 여름엔 1시간 뛴 만큼 땀이난다. 덕분에 강도높은 운동을 오래 한 뿌듯함에 쉽게 취한다. 여름밤 운동의 매력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 헉헉 거리는 숨소리만 크게 들린다. 애써 위로하듯 한 마디 뱉는다.
"집에 가서 씻고 나오면 무지 개운하겠다."
운동의 매력을 굳이 꼽자면, 땀을 흘리고 샤워하고 난 이후 개운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싶다. 운동은 싫어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그 찰나를 위해 운동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내가생각한 달리기 매력은 이렇다.
1.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자체에서 오는 뿌듯함
2. 달리는 강도, 거리, 속도, 장소. 전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3. 달리는 속도에서 오는 쾌감
4. 달린 후 땀이 나면 뭔가 했다는 성취감
5. 샤워를 하고 탄산수 한잔 마시며 얻는 개운함
매력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예상하지 못해서 안 뛴 것도 아니다.
예상 못했던 매력을 꼽으라면 2번,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사라진다. 현실과 상황을 떠나, 내 마음과 감정마저 통제당하며 살아간다. 그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을 어렵게 받아들이던 중, 달리기를 만났다. 달리기는 아직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있다는 희망이었고, 확장 가능한 틈새였다. 그래서 나는 달린다. 그것이 현실 도피일지라도, 잠시의 마취효과일지라도,그 매력은 무척 강렬하기에.
달리기 매력을 알았다고 인생 절반을 안 뛰던 사람이 갑자기 마라토너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날이 더워서, 몸이 피곤해서 라는 핑계가 이길 때가 훨씬 많다.하지만 매력을 느낀 후 변화는 분명하다.
'절대 뛸 수 없어'에서 '가볍게 뛰고 올까? 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
사소하지만 엄청 큰 인생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