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짧은 파편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유한하기에 삶이 소중하다고 믿었다.
한때는 웰다잉에 관심이 많았다.
잘 살기 전에, 잘 죽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모두 한 번은 죽어야 하니
그만큼 '잘'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없이 그랬다.
친구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다음 날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친한 친구 부모님의 부고는 달랐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친구였고,
삶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알고 있기에
그 이별은 결코 3인칭이 될 수 없었다.
함께 쌓아온 기억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게 다가왔다. 위로도, 말도,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모든 걸 잘 준비한다고 해서 죽음이 덜 허무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삶은 그냥 끝나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안고 살아갈 뿐이었다.
웰다잉 같은 소리 하네.
'잘 죽기'를 말하던 철학은 부질없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잘 죽는' 일 따윈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준비도 어떤 다짐도 아무 의미 없었다. 추억을 안고 견디는 게 아니라
죽을 만큼 힘든 자책과 미련, 지워지지 않는 빈자리뿐이었다.
장례식 갈 준비를 마쳤다.
친구와 통화하다 함께 울었다.
고속버스를 예매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슬픔은 가득했지만, 배는 고팠고,
쌓여있는 설거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인간은 참 이기적인 존재다.
아무리 슬퍼도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설거지를 하다 문득 깨닫는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저 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설거지를 마치고 하루를 정리할 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와야 할 사람이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게 죽음이었다.
죽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정은 결코 당연해지지 않는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모든 것이 부질없고 덧없고 원망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이 와중에도 나는 글을 쓴다.
슬픔을 해소하고 싶은,
살아있는 사람의 욕구에 충실하게.
아직 나는 살아있으니까.
아직 나는, 살아가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