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우리 Sep 11. 2016

나의 마이너리티 이야기 01

내가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 - 초등학교 편

앞으로 내가 만났던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내가 거부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내 안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한 가지 기준만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면서 이 사회에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문화란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소수자들이란

다수(majority)가 아닌 사람들

다수에게 영향력을 미칠 힘이 없는 사람들

다양한 이유로 그들의 목소리가 무시되고 또 부정되어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내 인생에 다가온, 또는 구석에서 조용히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전에 우선 내가 왜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부터 쓰겠다.


인간이란 존재는 실은 자신과 관계없으면 관심을 1도 가지지 않는 무서운 생물이다. 나도 그건 마찬가지라서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고 여겼던 내가 이런 주제로 글을 쓸 줄은 몰랐다.



조금 길어지겠지만 아주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나의 부모님은 선량한 시민들이시다. 

선량하다는 점은 어린 자식들에게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해 교육하고, 본인 스스로도 법을 준수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살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부모님들 본인이 실천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알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들의 교육은 내 백지 같은 머리에 기준으로 자리 잡아서 약자에게 친절하고 강자에게 강해야 한다는 것을 새겨 넣었다.



내 기억 속 가장 처음 떠오르는 소수자는 내 유치원 친구 무리에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약간 언행이 남들과 달랐다. 모자랐다고 표현하면 더 쉽겠지? 이름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산머슴 같은 아이는 그래도 활달하고 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항상 시커멓고 흙투성이 었다. 


나는 그 나와는 다른 그 아이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동등하게 친절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애에게도 다른 애들과 같이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착한 아이니까. 그 아이에게도 잠자리 잡기를 같이 하러 가자고 얘기했다. 그때 그 아이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대부분과 다른, 그런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너무 신나고 기뻐서 내게 더 잘해주려고 하고 나 대신 잠자리채에 잡힌 쐐기를 빼주기도 했다. 그때 처음 어린 나는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때 느끼는 감정', 불쾌함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아이를 잊었다.








 그다음은 초등학교 반 아이였다. 그 친구는 결식아동처럼 비쩍 마르고 눈이 바늘구멍처럼 작은 여자아이였다. 옷은 항상 재활용 통에 갈 만큼 유행에 지난 구닥다리 식이 었고 머리는 숱도 없고 힘이 없어서 짧은 머리가 삐죽삐죽 다른 길이로 이마부터 착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정도로 충분히 놀림거리였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애가 무당집 딸이었다는 것이다. 무당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일단 귀신 어쩌고 하면서 따돌림의 이유로 삼기에 초등학생들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아이는 따돌림이 익숙한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무척이나 조용했다. 유령처럼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습만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여자애들의 생일은 친한 세력을 과시하는 이벤트로서의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생일은 봄 무렵이라 아직 그렇게 뚜렷이 파가 나눠지지 않을 무렵이다. 게다가 나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자 주의기 때문에 그냥 나랑 아는 사이면 대부분 초대장을 나눠주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나는 그 친구 없는 아이에게도 초대장을 나눠주고 싶었다.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던 거 같다. 동정심이었을 수도 있다. 평소에 말도 걸지 않던 그 애에게 초대장을 주었을 때 그 아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 애를 초대한 것을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싫어했다. 나도 내심 후회를 하기도 하고 걔가 오는 것이 점점 날이 갈수록 싫어지게 되었다. 우리 초등학교는 깨끗한 아파트 단지와 오래된 달동네 사이에 위치해있었다. 자연스럽게 아파트 아이들과 달동네 아이들이 나뉘었고 나는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그쪽 친구들이 더 많았다. 달동네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무시받던 무당 딸에게 초대장을 나눠준 것은 그룹의 룰을 벗어난 '미운' 행동이었다.


친구들의 거부감과 내 행동이 상충하면서 나는 나도 무리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내 마음속에서부터 그 아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싫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일날이 다가왔는데, 나도 그리 잘 산 집은 아닌데 - 지방에서 10층짜리 아파트 살아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도 전셋집이었다 - 마치 공주님인 듯 도도하게 그 아이를 맡았다. 내 생일 파티에 내 친한 친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그 친구는 최대한 눈과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 생일파티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친구가 어떻게 보냈는지도.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하나로 버텼던 것 같다. 나는 지질했다. 차라리 다른 애들처럼 초대장조차 주지 않았더라면! 


그런데 그 생일날 그 친구가 나중에 내게 자신의 생일 선물을 주었다. 편지지 세트였다. 당시 여자아이들 사이엔 친구들 사이에 손으로 쓴 편지를 교환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그런 편지지 선물은 무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지는 내 고상한 취미와는 거리가 너무너무 멀었다. 


촌스러운 여자아이 그림과 그 당시에 내가 보기에도 유치한 색깔들, 그냥 줘도 안쓸 것 같은 편지지 묶음. 그날 저녁 나는 그 선물을 서랍장에 처박았다. 


이 짧은 교류에서 그 친구는 집에 전화기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 친구에게 처음 초대받은 학교 친구 생일파티는 얼마나 큰 의미였을까. 사실 그 편지지는 그 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은 아니었던 건지, 이제와 생각이 든다.







아파트에서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고 같이 놀이터에서 놀았다. 

달동네 아이들은 방과 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학교에선 우리와 함께 어울려 놀았다.



초등학교 3-4학년이 지나가 내 주변에는 '일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는 것을 무용담 삼아 이야기하고 성적인 농담을 - 무슨 뜻인지 알고 한 걸까? - 배워와서 자기들 만의 은어로 쓰고 중학교 언니들과의 인맥을 권력처럼 몸에 휘두르고 다녔다.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 참 초등학생 때부터 사회가 그대로 형성되는 것 같네...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공부를 잘해서 그 친구들이 괴롭히는 대상은 아니었지만 내 그림을 탐내서 그 친구들은 '의뢰'를 자주 했다. 여자 나체를 그려주면 500원을 주겠다던지, 일진 언니한테 편지를 보낼 건데 거기에 예쁜 만화를 그려달라던지 하는 것들.


게다가 그 언니들이 그걸 좋아하면 그 아이들은 내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고 가끔은, 정말 가끔은 자기들의 대화에 나를 끼워주었다.



내 친구들과 노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은 새로운 사회집단을 보는 듯한 호기심 충족, 즐거움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그 일진 아이들은 뭐하고 노는지를 옆에서 듣곤 했다. 그때 우리 반 일진 중엔 수지같이 생기고 초등학생인데 벌써 어른만큼 키가 큰 아주 예쁜 친구가 있었다. 이미 발육도 다 되어 어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다른 일진들과 다르게 감정이 크게 격해지지도 않고 욕도 많이 쓰지 않았다. 나에게 친절했고 미친놈처럼 자기감정 주체 못 하여서 타인을 괴롭히는 다른 일진들과도 달랐다. 


그 친구가 좋아서 그림을 많이 그려주었다. 그 애는 다른 애들처럼 내게 의뢰를 하지 않았었다. 그 애를 보면서 일진도 그냥 우리랑 같구나 싶었고, 그 애가 지난주 토요일에 소주를 마셨다고 하면 그냥 그랬었구나 하고 말았다. 나와는 달랐지만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 스스로는 담배를 매우 싫어하지만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내 친구들이 편하게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법을 처음 배웠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담임교사는 새로 전근 오신 분으로 깍쟁이 같은 여선생이었는데 과격한 분노를 매번 토해내는 억눌린 감정에 매인 사람이었다.


어른인 지금 보면 그 선생님은 본인이 무시를 많이 받아서 그렇게 분노가 쌓인 것 같다만, 초 6들이 그걸 어찌 아나. 게다가 그 분노는 약자 중의 약자를 향해 있었다. 


처음 6학년이 돼서 제비뽑기로 짝을 정했는데 내 옆엔 아주 까칠까칠한 머리카락을 가진 키가 작은, 눈매가 사나운 남자아이가 앉았다. 담임은 반을 통솔하는 게 무관심해선지 상당히 오래 이 자리를 바꿔주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짝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딱 봐도 타인에 대한 경계가 날카롭게 서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일진들이랑도 놀아봤고 왕따도 챙겨봤다는 경험이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은 그들이 남과 다른 것을 얘기해도 놀라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 이미 배운 뒤였다.


처음엔 나를 무시하던 그 친구는 점차 나랑 평범한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어갔다. 그 학기 매우 초반에 사건이 터졌다. 



담임이 학생들에게 집에서 설문지 조사를 시켰었다. 그걸 제출해서 내는 데 갑자기 교탁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더니 내 짝꿍을 앞으로 불러냈다. 담임의 분노는 상상초월이어서 어린 우리들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 없이 바들바들 떨었다. 


기억을 해보면 설문지에 그 친구 부모님 전화번호 란이 비어있었던 거 같았다. 담임은 그걸 왜 안 해왔냐고 따졌고 그 친구는 그냥이라고 말대답을 했다고 혼났던 것 같고. 앞으로도 해올 기미가 없는 것 같자 분노 게이지가 폭발한 담임의 손이 올라갔다. 싸대기! 그러곤 바로 당시 나보다 키도 작은 그 어린 초등학생의 멱살을 잡아서 교실문을 향해 아이를 던져버렸다.


쿠당탕하고 내 짝꿍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원래 사이코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담임은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였다.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 걸까. 그 이후로 그 친구는 1년 내내 담임의 밥이 되었다. 담임이라는 절대악이 존재하자 반 내에서는 왕따가 없었던 점이 특이한 점이었다고 기억난다. 반 친구들 간의 결속이 다져졌다. 


그 친구는 내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려했지만 나중에 대화 중에 나왔던 조각들을 모아 보면 이러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가 형과 자기를 홀로 키우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막노동인지 불규칙적으로 일하면서 일하는 동안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연락이 끊긴 모양이다. 집에 전화번호는 당연히 없었고 그런 개인 사정을 교탁에 서서 모두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친구는 버티다가 싸대기를 맞은 것이다.



양쿠미처럼 생겨서 성과지향주의적인 열혈교사였던 우리 담임에게 그 친구가 사실대로 얘기했다 해도 과연 그를 보듬어주었을까?


부모님 이혼에 대해 나에게 처음 얘기한 뒤 그 친구는 우리 사이에서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았고 우리와 매우 친해졌다. 아쉽게도 내가 6학년 2학기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그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진 이제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와 담임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내 머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초등학교 환경은 우리나라 극성 부모들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양육에 좋지 않은 거친 환경이었다. 날라리와 가난뱅이들. 약자를 돕고 평등하게 대해 주라는 교육을 했던 우리 부모님은 모순적으로 내가 그런 환경에 있는 것을 싫어하셔서 좀 더 '깨끗하고' '문제없는' 학군에 가길 원했다.


그렇게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끝났다.



엄마 아빠가 바라는 좋은 신도시 학군으로 이사를 가서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과 졸업식을 했다. 주고받을 수 있는 연락처라고는 집주소와 집 전화번호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예전 친구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거친 기억들만 적었지만 나의 초등학교 시절도 방과 후 먹는 길거리 간식들, 떡볶이, 친구들과 하던 얼음땡이나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그림 그리기 대회와 체육대회, 수학여행과 수련회, 서로 남몰래 좋아하던 여자, 남자아이들, 쪽지에 적은 서툰 고백편지, 길고 긴 방학과 귀찮았던 방학 숙제, 매일 채점받던 일기,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남자아이들, 부끄러움 타는 여자아이들로 가득 찬, 남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있다. 

하지만 떠올려보면, 그렇게 평범한 학교 안에서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초등학교 시절을 거칠고 괴로운 기억으로 채울 수밖에 없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패배한 사람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