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작가라서 그래요
"샀던 책 중 안 보고 버린 책이 뭐야?" 누군가 물었다.
"밑줄 그을 게 없는 책" 누군가 대답했다.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다. 책도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한 권이 스토리로 꽉 찬 소설을 좋아한다. 밑줄 그을 거 하나 없어도 나는 그게 좋았다.
어릴 때 추리소설만큼은 즐겨 읽었고, 스트레스받으면 '그것이 알고 싶다'를 틀었던 나다.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예전에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 아쉽기도 했다. 감성적인 공감이 떨어지는 나에게 어쩐지 어울리는 직업이기도 했으니까.
2020년, 시간이 많아진 그 해에 처음 집어든 책도 그래서 추리소설이었다. 처음에는 집에 있던 책 중에 추리소설을, 그 뒤에는 동네 도서관에서(캘리포니아 살 때였는데 한국 책이 구비된 도서관이었다), 그 이후에는 밀리의 서재를 통해.
추리소설을 읽으며 밑줄 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기가 막힌 문장을 발견하면 쓱 긋기는 하지만, 문장 자체가 좋을 뿐 메시지는 아니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무슨 대단한 메시지가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범인은 누구지?'라는 궁금증을 던져주고 강약을 조절하는데 힘을 실으면 될 뿐이지.
그 뒤에 좋아했던 소설들은 내 가슴에 울림이 주는 소설들이었다. (지금은 다양한 책을 읽긴 하지만 여전히 소설이 가장 좋다)
- 프레드릭 배크만의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수동적으로 살아온 한 여자의 삶이 바뀌어가는 모습으로 내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그의 다른 소설 <베어타운> 시리즈에서는 성폭행당한 아이와 부모의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변하는지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이런 건 기사 한 줄보다 나에게 오래 남는다.
-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64세에 처음 소설을 쓴 작가가 98번의 거절 끝에 출간했다는 스토리만으로 울림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작가만큼이나 당찬 여자였다. 마음에 든다.
-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며 '부모의 죽음'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했다. 아직 살아계신 두 분에 대해. 그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았다. 나에게는 필요한 부분이었다.
- 한창훈 작가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읽는 내내 마음이 꽉 채워졌다. 이 책은 메시지가 많다. 행복에 대해서,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듣는 태도에 대해서, 그 밖의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런 말을 한다.
메시지를 그대로 말해버리면 10분이면 끝날 것도, 소설은 반년씩이나 걸린다고. 그래서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란다. 머리 좋은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한단다. 후지산 산기슭에서 몇 가지 각도로 바라보고 파악을 끝내는 효율적인 사람이 아니라, 직접 자기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 보고 나서야 몸으로 납득하는 게 소설가란다.
밑줄 그을 부분이 너무나 많은 자기 계발서의 경우 나는 버겁다. 소화가 되질 않는다. 메시지 하나를 길고 길게 늘여서 천천히 내 마음으로 침투하고, 몸으로 체득하게 만드는 소설이 그래서 좋았다.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효율성도 다소 떨어지는 나랑 결이 맞는다.
기가 막히게 유명한 박물관에 가서 300개의 훌륭한 작품을 감탄하며 보고는 왔는데 돌아서면 기억이 잘 안나는 그런 상황이랄까?
그래서 에세이도 하나의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한 주제에 대해서 , 작가의 기억과 경험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스토리라고.
그런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긴 스토리로 한 권이 마무리되는,
그 안에 조금씩 유머가 숨어져 있고,
결국에 하나의 메시지가 독자에게 스며들어가는
그런 에세이 말이다.
매 꼭지 마지막에'자, 메시지 시작됩니다, 밑줄 그을 준비 하세요' 식의 책은 쓰고 싶지 않았다. 이건 메시지가 너무 많아 버거운 게 아니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1차 퇴고 과정은 스스로 나를 납득시키고,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이었다.
"초보 작가의 글, 누가 끝까지 봅니까? 꼭지마다 마지막에 메시지가 있어야 해요"
'자기 계발서도 아닌데 꼭 그래야 해? 안 그런 에세이도 있잖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같은 책은 그렇게 억지로 메시지를 넣지 않았는데도, 목차를 자유롭게 썼는데도 잘되지 않았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워야 했다.
'저 책 저자는 초보 작가가 아니었잖아, 필력이 갖춰졌으니까 잘된 거지, 첫 책이었으면 그만큼 잘되지 않았겠지, 독자가 메시지를 원한다잖아, 메시지가 없으면 그게 일기지, 출판사가 좋아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라며 나를 설득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완전히 마음이 납득해야 손이 움직이는 성격인데, 그 과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글을 계속 고쳐야 했다. 마시막에 메시지를 채워야 했다. 꾸역꾸역. (아직도 100%는 아닙니다만)
이것이 나의 메시지에 대한 딜레마였다.
지금도 '자, 밑줄 타임입니다' 식으로 마무리 짓는 건 지양하긴 한다. 나는 그렇게 기똥찬 메시지를 잘 쓰는 편이 아니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가 주는 게 메시지라고 넓게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그 와중에 저 말은 충격이었다.
밑줄 그을 게 없는 책이라 버렸다니.
아무래도 내가 쓴 40 꼭지의 메시지를 다시 점검해야겠다.
버려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일기를 쓰는게 아니니까.
오늘도 나는 그렇게 나를 설득하고, 타협한다.
초보작가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