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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Oct 31. 2019

사용 vs. 언급

논리학 입문 #6


"팔만대장경은 몇 글자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섯 글자요."


[1] 팔만대장경은 몇 글자?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그 판이 8만 개라고 합니다. 경판 하나에도 여러 글자가 새겨질 테니 글자는 훨씬 더 많겠죠. 그 수가 무려 5,000만을 넘어선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이 다섯 글자로 이루졌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2] 무엇이라 말하는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5,000만 자로 이루어진 팔만대장경은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불에 탈 수도 있고, 먹물을 발라서 인쇄할 때 쓸 수도 있는 목판을 의미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약 5,000만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때 발화자는 바로 그 목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죠. 그 목판언급mention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팔만대장경"이라 말합니다. 그 단어 사용use하는 거죠.


아마도 팔만대장경이 다섯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해인사에 보관된 물건(=대상object)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이라는 언급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낱말은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게 맞으니까요.


논리학자들은 어떤 언어적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급될 때, 그걸 명확히 나타내기 위해 주로 작은따옴표(`)를 사용합니다.


(1) 팔만대장경은 약 5,000만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2) '팔만대장경'은 다섯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요.


문장(1)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경판 일체를 언급하는 것이고요. 이를 위해 '팔만대장경'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반면 문장(2)는 '팔만대장경'이란 말 자체를 언급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사용.

그러니까 우린 어떤 것을 언급하기 위해 '어떤 것'을 사용하는, 그러니까 어떤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어떤 것'이라 말하는 셈이죠.


물론 일상에서 작은따옴표를 통해 사용되는 말과 언급되는 말을 구분하진 않습니다. 문맥을 통해 그것이 사용되는지 혹은 언급되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다면 우린


"1루수가 누구야?"

"응"

"아니, 1루수 이름 말이야."

"누구."

"1루에 있는 사람!"

"누구."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하루에도 여러 번 했을 겁니다.



[3] 사용과 언급을 혼동하는 오


1/2의 분자는 1이다. 그런데 1/2과 2/4는 동일하다. 따라서 2/4의 분자는 1이다.

이 논증, 어딘가 이상하죠? 이 논증은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number와 그걸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로서의 숫자numeral를 혼동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가령 '3'과 'III', '' 등은 모두 다른 기호이지만, 동일한 수학적 존재자를 지칭요. 여러 문화권에서 같은 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다른 숫자를 써온 것이죠.


1/2과 2/4가 동일하다고 말할 때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입니다. 종이에 쓸 수 있는 아라비아 숫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지만 분자는 숫자예요. 그래서 '1/2'의 분자는 '1'이 되고, '2/4'의 분자는 '2'가 되는 것이죠. 위 논증은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 오류를 보다 정확히 보려면 논증을 다시 써야겠네요.


'1/2'의 분자는 '1'이다

1/2 = 2/4

'2/4'의 분자는 '1'이다



첫 번째 전제는 숫자에 대한, 그리고 두 번째 전제는 에 대한 문장입니다. 하나는 숫자언급하는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숫자를 사용함으로써) 를 언급하는 겁니다.  두 문장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1루수가 누구야?〉 자세히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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