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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Nov 02. 2019

뜻 vs. 지시체

논리학 입문 #7

[1] 의미의 의미


어떤 언어적 표현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건 다시 무얼 의미할까요?

가령 '과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린아이가 과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사과, 배, 복숭아 같은 거야." 그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들을 열거하는 것이죠. 사과, 배, 복숭아 - 이것들이 바로 '과일'의 외연extension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너무 어리지 않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죠. "식물의 열매인데 먹을 수 있는 거야." 그 표현이 함축하는 속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과일들의 속성을요. 이걸 내포intension라고 해요. (혹은 사전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정의definition내포를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무언가가 의미하는 걸 집합으로 나타낼 수도 있니다.

'과일'의 외연은 {사과, 배, 복숭아, }와 같이 원소나열법으로 제시할 수 있. 하지만 집합은 조건제시법으로 나타낼 수도 있어요. {x|x는 식물의 열매로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요. 이렇게 제시될 때엔 '과일'의 내포가 드러나죠.



[2] 같은 외연, 다른 내포


집합 {x|x는 2와 8 사이의 소수prime number}{x|x는 2와 8 사이의 홀수다}를 원소나열법으로 나타내면 모두 {3, 5, 7}가 됩니다. '2와 8 사이의 소수'와 '2와 8 사이의 홀수'는 외연은 같아도, 내포가 다른 거예요. 어떤 의미에선 같은 걸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 의미가 다른 겁니다.

그냥 넣어본 그림


[3] 지시체와 뜻


이렇게 볼 때 외연과 내포는 각각 논리학자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가 도입한 지시체referencesense에 대응하는 듯 보입니다.


[지시체]

지시체는 외연과 같습니다. 어떤 표현의 지시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죠. 프레게는 이걸 의미론적 값semantic value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이렇게 도입하죠.


어떤 표현의 의미론적 값[=지시체]은 (…) 그 표현이 등장하는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것


"딸기는 빨갛다"는 문장이 참인 것은 '딸기'라는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 바로 작은 씨가 박힌 그 과일이 빨갛기 때문이죠. 반면 "포도가 빨갛다"는 문장이 거짓인 까닭은 '포도'의 지시체, 곧 와인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그 여러 알로 이루어진 과일이 빨갛지 않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만약 '포도'가 딸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면 "포도가 빨갛다"는 문장은 참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 문장의 진리값truth value을 결정하는 건 이 문장에 포함된 '사과' 혹은 '포도'라는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 즉 이들의 지시체입니다.

(그래서 문장의 지시체는 진리값입니다. 스스로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스스로의 진리값이죠. 그러니 문장이 가리키는 건 참 혹은 거짓입니다. 문장은 진리값을 지칭한다, 좀 멋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문장에 나타난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더라도 두 표현이 같은 지시체를 갖는다면 그 문장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1) 조선 제4대 국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2)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위 두 문장은 모두 참입니다. ' 제4대 국왕''대왕'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니까요. 두 문장은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자체로도 동일한 지시체(=참)를 갖는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같습니다.


[]

그런데 세종대왕이 조 제4국왕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떤 사람은 문장(2)가 참이라는 걸 알지만, 문장(1)이 참이라는 건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문장(2)는 이해하지만) 문장(1)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조선 제4국왕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 사람은 문장(1)에서 무엇을 보는 걸까요? 바로 입니다. 프레게는 이렇게 말해요.


어떤 표현의 의미론적 값을 모르되 그 뜻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그럼 뜻은 정확히 뭘까요? 내포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프레게가 하는 말은 조금 더 들어보죠.


어떤 표현의 뜻은 그 표현을 이해하는 이가 파악하는 것이다


'조선 제4대 국왕'이란 말을 이해understand하는 사람이 파악grasp하는 바로 그것(!)이 '조선 4대 국왕'의 뜻이란 거죠.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바로 이 그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표현의 뜻은 그 의미를 구성하는 성분으로서 그 의미론적 값[=지시체]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뜻은 내포와 비슷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식물의 열매로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과일'의 내포는 바로 그 지시체(=외연) 결정하니까요.

(하지만 내포와 뜻이 완전히 동일한 개념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습니다. 열대 과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뚜리안은 과일이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겁니다. 하지만 그걸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건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어떤 것이 뚜리안들의 집합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속성들을 다 알지는 못할 수도 있겠?)


프레게는 또 문장의 뜻이 바로 명제proposition된다고 말합니다. (문장의 지시체는 진리값이라고 했었죠?)

비가 온다
It rains
Es regnet
雨が降る

위 문장 4개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비가 오는 날엔 모두 참일 것이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엔 모두 거짓이겠죠. 하지만 지시체만 같은 건 아니에요. 이들의 의미가 같은 게 단순히 모두 같은 진리값을 가져서는 아니라는 거죠.


비가 오는 날엔

비가 온다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이 두 문장이 모두 참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거죠. 하지만 이들 문장을 이해하는 우리는 두 문장이 여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뜻이 다르다고 보는 거예요. 두 문장 속에서 각기 다른 명제를 보는 거죠.


[4] 뜻이 있는 곳에 지시체가 있다?


뜻이 있다고 지시체가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이해하면서 파악하는 무언가가 있더라도 그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대한민국의 여왕'이나 '가장 큰 자연수'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시체는 없어요. 대한민국에는 여왕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연수를 내놓더라도 그보다 큰 자연수를 생각할 수 있고요. 어떤 표현이 뜻을 갖는다고 곧 그 표현이 지칭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신'의 의미가 있다
'신'의 의미는 전지전능한 자다
∴ 전지전능한 자가 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이 논증을 펼치는 사람은 이 논증의 형식이

A가 있다
A는 B다
∴ B가 있다

이렇게 타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신'이라는 단어에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무의미한 말이 아니에요. 이 단어를 사용해서 앞뒤가 맞는 대화를 하는 게 가능하죠. 하지만 이런 사실이 곧 이 단어가 지칭하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뜻이 유무와 지시체의 유무는 다른 것이니까요.

 논증은 전제(1)에서 뜻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전제(2)로 나아가서는 지시체를 언급해요. 말하자면

A1이 있다
A2는 B다
∴ B가 있다

이런 부당한 논증 형식을 취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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