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처럼 착용하면 요괴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요괴워치. 초딩들을 사로잡은 요괴워치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 매력은 애니메이션 〈요괴워치〉의 세계관에 있을 터.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은 사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요괴들이 꾸민 일들이다. 충동구매를 하는 것도, 야식을 먹고 싶은 것도, 중요한 걸 자꾸 깜빡하는 것도,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도. 심지어 날씨가 갑자기 바뀌는 것도. 장난기가 많은 요괴들은 가전제품을 망가뜨리거나, 휴대폰 전파를 막아버리고, 정전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바지 지퍼를 열어버리는(…) 녀석도 있다.
요괴워치는 바로 이 요괴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주인공은 이 요괴워치를 통해서 요괴들을 만나고, 나쁜 짓을 하는 요괴들을 설득하거나 물리쳐서 문제를 바로 잡는다. 주인공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설득당한 요괴는 주인공이 봉인시켜서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그냥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 이 생각은 인류 문명의 한 축이다. 물론,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계론적 세계관이 다른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기실 만사가 목적 없는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이미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세계를 그저 필연이나 우연에 의해 "그냥 그렇게"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로만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그렇다. 그들도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기린은 왜 목이 길어요?"
"자동차는 왜 소리를 내요?"
"비는 왜 내려요?"
그런데 그들은 좀처럼 과학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목이 짧은 기린은 다 못 먹어서 죽었거든."
"연료가 갖고 있는 화학 에너지가 파동 에너지로 바뀌면서…."
"구름을 이루는 수증기 입자가 뭉치면서 무거워지니까 떨어지는 거야."
이들 현상에 딱히 이유reason는 없다. 원인cause이 있을 뿐. 그래서 이런 설명이 끝나고 나면 으레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그건 왜 그런데요?"
그래서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키 큰 나무 이파리를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소리 듣고 비키라고 그런 거야."
"예쁜 꽃들 키 크라고 천사들이 하늘에서 뿌려주는 거야."
현상의 이면에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란 생각들. 이제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요괴워치〉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사실 여기 녹아든 목적론적 세계관은 벌써 수천 년 전부터 인류를 매혹해왔다. 가령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친 것은 열대성 저기압 때문이 아니라, 화가 난 포세이돈이 뱃사람을 벌하기 위해 삼지창을 휘둘렀기 때문이라든가.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더위나 추위에 고통받지 않도록 아폴론이 적시에 태양을 올려놓고 다시 내려놓기 때문이라든가. 이런 이야기들은 질릴 법도 한데 도대체가 질리지 않는다. 때문에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신화와 종교 없는 나라 있는가.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로부터 익숙한 것을 추출해내는 일은 우리에게 안도감과 편안함과 만족감은 물론 힘을 준다. 알려지지 않은 것 앞에서 인간은 위험을, 불안을, 걱정을 느낀다. 이때 [고개를 드는] 최초의 본능은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 그 어떤 설명이라도 아무 설명도 없는 것보단 낫다.
프리드리히 니체 「네 가지 중대한 오류」
요괴워치를 통해 세계를 보려는 경향성은 삶의 곳곳에 묻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그렇다. 이 고통이 잘못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고통스럽지 않은가. "올해 농사가 안 된 것은 우리가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하층민인 것은 전생에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렇게 고통을 견뎌왔다.
값비싼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고 난 후에 스스로를 책망하다가 문득 이 모든 것이 요괴의 수작임을 깨닫게 된다면 죄책감(?)으로부터 얼마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신화나 종교, 혹은 요괴워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세상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도 (혹은 적어도 세상사에 개입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제물을 바치는 일도 어디까지나 신화적·종교적 세계관을 채택한 후에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요괴워치를 이용해 요괴를 볼 수 있어야만 요괴들을 설득하거나 물리칠 수 있게 된다. 문제를 바로잡거나 적어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니 인류는 더더욱 요괴워치를 완전히 내려놓기 힘들다.
물론 근대인들은 요괴를 믿지 않는다. 요괴워치도 결국 아이들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신화"라는 말도 이제는 "널리 받아들여지고는 있지만 가짜인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종교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은 신을 죽이지 않았는가?
세상은 "그냥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양한 의미 체계를 만들어낸 것도 인류이지만, 동시에 요괴워치를 집어던지고 세계를 세계로 보기 위해 노력해 온 것 역시 인류다. 근대를 사는 우리에게 "태양은 그저 불타는 돌덩이에 불과하다"는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일침이 불경하게 들리지 않고, 통쾌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그 어떤 세계관도 세계 그 자체보다 선행할 수는 없다. 세계와 그 속의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체계를 직조해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래서 인류는 신화와 종교가 끊임없이 삶의 자리를 넘보거나, 더 나아가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그 과정을 계몽이라 한다.
과학이 곧 요괴워치 너머의 세계를 오롯이 담아낸다는 얘기가 아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맹신하는 것은 또 다른 요괴워치를 착용하는 일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이를 두고 "계몽이 또한 신화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손목에 찬 요괴워치를 벗어던진 후에도 남아 있을지 모를 다른 요괴워치도 경계할 일이다.
요괴워치를 모두 벗어던지란 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요괴워치를 통해 세계를 보는 일은 언제나 그 너머의 세계를 보는 일임을 기억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신화가 이미 계몽"이라고도 말한다. 옳은 말이다. 계몽이란 결국 세상사를 보다 잘 설명해내려는 움직임이 아니던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란 점에서는 신화·종교와 과학이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지나지만, 그들의 초점은 같은 곳에 맺힌다. 세계. 그리하여 요괴워치로 보는 세계와 요괴워치 너머의 세계, 둘은 다른 것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