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사태를 향한 시선들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 2016년 12월號에 게재한 글을 소폭 수정한 것입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때면 한 번쯤 듣게 되는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하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보라. 국민이 국민을 위해 쓰라고 내어준 권력을 국민 몰래 다른 이에게 쥐어준 대통령에게는 여전히 “잠이 보약”이지 않은가. 그런 대통령을 보좌하던 자는 검찰청에서도 팔짱을 끼는 여유를 보이지 않던가. 사정이 이러한데 백만이 넘는 함성과 촛불이 광장으로 나온들 씨알이나 먹힐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말들.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소용이 왜 없어? 있지!”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기실 우리는 이쪽이 되기도 하고, 저쪽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스스로를 비관적이라 탓하다가, 또 언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는 이미 바뀐 것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자고 일어났더니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나, 국민이 대통령의 잘못을 묻고자 거리로 나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변화가 아니냐고. 그는 대통령이 옷을 벗을 것이라 단언하지 않는다. 정치공학적인 힘은 국민의 목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만 살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나라가 바뀌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가. 한데 나라의 주인이 되는 자가 변하고 있으니 반길만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비관적이지 않다.
무언가는 이미 바뀌고 있다는 말들. 우리는 변화의 원인이라기보다 변화의 부분이다. 현실적인 변화는 초래cause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는 함성과 촛불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활시위를 놓는다고 과녁을 맞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활시위를 놓으면서 활을 쏘지 않을 수도 있는가. 함성과 촛불은 변화를 구성constitute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적 변화를 목도한다. 우리가 곧 역사적 변화이기에.
인간은 같은 현실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같은 자리에 꽂힌 화살이라도 어쩌다 날아가 버린 것과 조준하여 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 마찬가지로 국민이 그간 대통령이 저지른 일들을 “농단”이라 규정할 때, 그의 향후 행보는 달라지지 않을지언정 결코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은 이렇게 같은 현실에도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비로소 역사를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에 떠간 화살과 다른 것은 그것이 다른 속도로 나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살이 날아가 버린다 말하지 않고, 궁수가 활을 쏘았다 말한다. 인간사를 단백질 덩어리의 움직임으로 환원하거나 인과관계의 연쇄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겨울의 촛불과 함성은 人間事를 人間史로 바꾸는 것이라 보는 편이 옳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고려대 총장을 지낸 故김준엽 선생의 이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현실로서의 人間事를 바꿀 수 없다고만 생각지 말고, 스스로 人間史의 한 부분이 되라는 말이 아닐까.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니,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이 의미의 묶음은 역사가 되고, 그래서 모든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된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맞이하자면 오늘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자면 역사에 남겨야 한다. 우리가 눈 내리는 광장으로 나아가는 이유다. 차가운 현실이 또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넘실거리는 역사의 흐름이 되기 위하여. 김준엽 선생은 역사에 살라는 당부와 함께 이렇게 첨언했다. “긴 역사를 볼 때 진리, 정의,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이 역시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