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수프』의 '당근 수프'
MBTI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MBTI가 완벽하게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고, 오랜 기간 성격 판단의 기준이 되어주고, 스몰토크의 수단으로 쓰였던 혈액형론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 나는 활기차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O형 여자였는데, 이제는 내향적이고, 직관적이며, 감정을 더 중시하고, 즉흥적인 사람이 되었다. 즉, 내 MBTI는 INFP라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의 난 썩 활기찬 편은 아니다, 직설적이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여기에 자신의 특정 성향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각 알파벳마다 '대문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느 문자에 대문자를 붙이고 싶은가. 당신의 MBTI에도 유독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외향인보다 더욱 외향인이라면 '대문자 E'라는 표현을, 누구보다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문자 N'이라는 표현을 쓰면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 되는대로 사는 나는 '대문자 P'다.
아리가 가오루의 『라이프 수프』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수프 레시피가 무려 마흔여덟 가지나 되는 레시피 북이다. 맛있는 수프 사진이 잔뜩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하지만 눈으로만 먹고 책을 덮어버린다면 그 책이 가진 능력을 반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요리책'을 100% 활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만들기로 넘어가야 하는데, 고민과 걱정부터 앞서다 보니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무슨 수프부터 만들어야 할지, 재료는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다 살 수 있을지, 다른 요리에도 사용되는 재료면 좋겠는데, 활용도가 높은 재료일지 등의 고민들이 머릿속에 줄을 지어서 떠오른다. 요리뿐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결정에 늘 이렇게 끝없는 고민이 따르는 편이긴 하지만….
언제 날 잡아서 만들어보고 싶은 수프의 재료를 사 와야지. 그러면 미리 그 수프의 재료를 적어야 할 거야. 그건… 내일 적자. 그렇게 수프 만들기의 첫 걸음인 재료 목록 적기는 온갖 핑계로 인해 내일로 내일로 또 내일로 미뤄지고, 그리고 오늘 충동적으로 집에 오는 길에 당근 한 봉지를 사 왔다. 이유는 그냥… 마트에서 마침 당근이 할인을 하길래. 집에 가서 당근을 활용한 수프 레시피는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는 재료는 사러 나오지 뭐.
이게 '대문자 P'의 삶이다.
당근 두 개 버터는 이십 그램 소금 작은 술로 한 스푼 물은 약 오백 미리
생각보다 간단한 당근 수프 레시피가 있었다. 재료는 딱 4개. 다시 나가서 사 올 필요도 없다. 이제 싱글벙글 즐거운 요리시간이다. 당근 두 개를 깨끗하게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썬다. 계량컵은 선반에서 꺼내 미리 물을 오백 미리 담아놓는다. 소금통도 꺼내놓고, 그리고 버터….
아뿔싸, 집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버터가 없다. 냉장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가 않는다. 분명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어떤 작은 용기에 버터가 있었는데요. 평소 유제품을 싫어하는 탓에 버터 역시 즐겨 먹지를 않으니 엄마가 먹어버린 듯했다. 그렇게 돌발상황에 당황한 나는… '땅콩버터'를 집어 들었다. 위선도 '선'이고, 악법도 '법'이면, 땅콩버터도 '버터'잖아요. 세상 모든 요리사들이 기막혀할 발상이다. 나도 버터가 없다고 '땅콩버터'를 넣는 게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 요리 못하는 사람 특징이 레시피가 시키는 대로 안 하는 거라고. 그렇게 땅콩버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뚜껑을 도로 닫았다.
다시 한번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한다고 없던 버터가 생길 리 만무하겠지만, 그건 사실 적당히 괜찮은 대안을 생각하느라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에 가까웠…. 아니, 버터가 생겼다. 냉장고에 있던 앙버터 빵이, 팥 앙금 위에 두껍게 썰린 버터가.
… 땅콩버터보다는 팥 앙금 살짝 묻은 버터가 수프 만들기엔 훨씬 더 낫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당근 수프'. 내 평소 요리 실력보다 훨씬 웃도는 맛이 나왔다. 당근은 특유의 단맛이 빠져서 푹 익은 감자를 먹는 듯했고, 당근이 우러나온 수프는 달콤하면서도 짭짤했다. '내 요리 실력보다 웃도는 맛', 이게 가능했던 건 사실 '당근 수프'가 그 책에서 제일 쉬운 레시피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레시피가 복잡했으면 버터가 없다고 땅콩버터를 집어 들듯 임기응변 아닌 돌발행동이 늘어나고, 저자가 설정한 최상의 맛에서 더욱 멀어졌겠지. 파스타 면에 후추와 돈가스 소스를 뿌려먹으면 도시락 함박 스테이크 밑에 깔린 면 맛이 난다고 좋다며 먹던 나에게 있어서는 작지만 큰 성공이었기에 기록하고 싶었다. 내일은 요리에 좀 더 자신감 붙은 하루가 되기를, 다음엔 더 난이도 있는 수프에 도전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