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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Oct 23. 2020

한치잡이 배 불빛은 우리를 위로해주지

당신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무섭게 들이치던 태풍이 잠시 쉬는 틈을 타 제주 행 배를 탔다. 배 갑판에 나가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무지 덥겠는데?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는 태양을 보며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퀸 메리호가 힘찬 엔진 소리를 내며 나아가자 나는 금세 설레기 시작했다. 새우깡을 받아먹던 갈매기가 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멀어졌다. 아름다운 제주 해안가, 고소한 땅콩 아이스크림과 싱싱한 회, 그리고 내 친구 연쌤. 제주도로 향한 이유를 떠올리자 근심과 걱정도 점차 멀어졌다. 일상과 제주와의 거리는 겨우 네 시간이었다.


연쌤은 같은 관리실에서 만난 동료였다. 우린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동기였고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였고 함께 글을 쓰는 문우이기도 했다. 연쌤은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지만 나이는 우리 사이에 특별한 장벽이 되지 않았다. 우리 우정은 연쌤이 일터를 옮기기 위해 제주로 이사를 가서도 계속되었다. 연쌤의 이사는 갑작스러웠기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몹시 서운했다. 그러나 그래야만 했던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당시의 그를 괴롭히던 수많은 관계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의 일터로 도망 온 것처럼 말이다.

연쌤이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수! 잘 지냈어요?”
“전 잘 지냈죠. 연쌤도… 잘 지냈나 보네요.”
헬멧을 벗자 도망자치고는 해맑고 귀여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제주도의 햇살에 건강하게 타오른 그는 옹골지게 잘 익은 해콩처럼 보였다. 늦은 밤이라 딱히 연 카페도 없어서 우린 간단히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헬멧을 쓰고 그의 뒷자리에 앉았다. 스쿠터는 처음이라 낯설었다.

“허리 잡으면 되죠?"
“허리는 연인들끼리 잡는 곳이지만 수에겐 허락할게요.”
이상한 유머도 날씬한 허리도 여전했다. 연인처럼 꼭 껴안은 채 우린 제주 해안가를 달렸다.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던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근방에 내가 자주 가는 해변이 있어요! 잠깐 보고 갈까요!”
“좋아요!”
스쿠터를 주차하고 내리는 길에 슬리퍼를 벗었다. 맨발로 해변을 걷자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보드랍게 스쳤다. 생경함에 신이 난 여행객과 달리 연쌤은 그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내 뒤를 따랐다. 제주도민이 된 자의 여유로움이었다. 어두운 파도가 우리 쪽으로 힘차게 밀려왔다 힘없이 밀려갔다. 대전에서는 바다를 볼 일이 없어서 눈에 꽉 차는 밤바다가 무척 신기했다.

“여기 이름이 뭐라고 했죠?”
“광치기 해변이에요. 나는 여기가 정말 좋더라. 저길 한번 볼래요?”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엔 노란색 물감을 쿡 찍은 것처럼 뚜렷한 불빛이 있었다. 불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번쩍이고 있었다.

“한치잡이 배 불빛이에요. 마음이 힘들면 여기서 한참이고 저 불빛을 봤어요. 그럼 위로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산뜻한 말투였지만 외로운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는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그에겐 5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긴 시간을 함께한 애인과 헤어진 상실감을 쉽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산다는 게 다 그렇잖아요.”

연쌤의 담담한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자세히 들었다가는 주책맞게 울 수도 있어서 되려 잘 된 일이었다. 연쌤이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그러니까 수는 얼른 세컨드를 만들어버려요.”


우리는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파도에 묻어버리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헤어지기 전에 포옹을 했다. 그가 팔로 나를 끌어안아 토닥여줬다. 내 팔이 짧은 게 무척이나 아쉬운 헤어짐이었다. 며칠 뒤 목포항으로 가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저녁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캄캄한 바다 저 멀리 노란 불빛이 보였다. 한치잡이 배였다. 찌르듯 눈부신 불빛은 우리 배가 한참 멀어졌어도 선명하게 보였다. 연쌤이 위로받았다는 한치잡이 배 불빛과 점차 멀어지는 것이 몹시도 아쉬웠다. 연쌤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잘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재미없는 일과 재미있는 일이 8:2 정도 비율로 일어나는 이곳에서 종종 나는 답답함에 다시 연쌤이 있는 제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무계획한 나는 제주에서 일어나는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황홀한 사건을 대전살이와 똑같은 감정으로 보내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여행이 될 거라는 점을 깨닫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대신 연쌤과 함께한 잠깐의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연쌤의 외로운 날들 중 함께 한치잡이 배 불빛을 바라본 그날은 내가 연쌤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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