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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Oct 08. 2020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은?

아-빵!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올갱이를 잡으러 개울가에 놀러 갔었다. 어쩐 일인지 그 기억 속엔 아빠와 나뿐이다. 아마 언니와 동생은 엄마를 사이에 두고 낡은 텐트의 섬유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단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돌이 무지막지하게 등을 찔러대던 탓에 나는 잠에 들 수 없었다. 젊고 기운이 넘치는 아빠도 남는 에너지를 낮잠 자는데 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삼십대의 아빠는 일곱 살의 어린 나를 따끈하고 커다란 돌 위에 앉혔다. 그리고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양산빵 두 봉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 빵을 한 봉지씩 나누어 먹기로 했다. 두 봉지 다 크림빵이었는데 하나는 크기가 크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 아빠는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 나는 오래 생각 않고 둘 중 더 큰 빵을 골랐다. 아빠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작은 빵 봉지를 뜯어 반을 갈라 크림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 작은 빵에 크림이 더 많아."


나는 서둘러 큰 빵을 갈라보았다. 정말이었다. 아빠 빵의 풍부한 크림에 비하면 내 빵은 크기만 컸지, 크림은 코딱지만큼 들어있었다. 나는 빵을 바꾸자고 졸랐다. 그러나 인생이란 녹록치 않았다. 아빠가 빵을 단 두 입만에 먹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크림이 채 닦이지 않은 혀를 길게 내밀어 나를 놀리기까지 했다. 나는 몹시도 약이 올라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울었다. 아빠는 내 입안에 작게 쪼갠 빵을 하나씩 먹여주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빠가 넣어주는 퍽퍽한 빵을 꾸역꾸역 받아먹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눈물 콧물 흘리며 빵을 먹는 어린 딸과 딸을 바라보는 개구쟁이 젊은 아빠. 당시의 나는 아빠의 장난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다. 지금이라면 아빠가 먹을 커피에 소금을 넣는 장난으로 되갚아줬을 텐데 말이다.


잠시 엿본 눈부신 기억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다. 갓 구운 빵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양산빵이 익숙한 아빠에게 파리바게트의 빵을 종류별로 사다 주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게 빵 고르는 기준을 알려준 최초의 인물은 이제 빵 고르는 새로운 기준을 나에게서 배워가고 있다. 빵 나오는 시간에 맞춰 빵집에 가는 것을 기본으로, 빵과 어울리는 커피나 차는 무엇인지, 또 요즘 빵은 크기가 커도 크림이 많을 수 있다는 사실도 말해줬다. 아빠는 인생의 기준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리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새로운 맛과 향을 충실히 받아들였다. 빵집마다 다른 통신사 할인율과 포인트 적립률을 설명해 주니 아빠는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질 정도로 놀라워했다.


아빠가 혼자 도넛 가게에 갔다며 카톡 한 적이 있다. 내가 선물해 준 쿠폰으로 도넛을 샀다고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아빠는 도넛 가격을 하나하나 계산한 뒤 그 쿠폰을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깜짝 놀랐다. 스스로 해보라고 모바일 쿠폰을 보내준 것을 정작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보낸 카톡을 확인한 후 정말이지, 아빠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또 귀여워 하루 종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반백살이 넘는 나이에 뭘 더 배우냐며 자조하던 아빠가 이 어려운 걸 하나 해낸 거라고 나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건넸다. 아빠는 머쓱한지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는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자주 만나진 못 해도 나는 빵을 먹을 때면 늘 아빠가 생각나 핑계 김에 전화를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아빠는 공장 이모님이 슈크림을 한 통이나 만들어줘 식빵에 발라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는 근황을 전했고 나는 맛있는 빵집이 생겼으니 다음에 대전 오면 같이 먹으러 가자고 답변했다.


종종 아빠를 위해 베이킹을 배워볼까, 아니면 아빠가 퇴직하면 함께 빵집 투어를 다닐까 하는 계획을 짠다. 아님 빵 리뷰 블로그나 유튜브를 해볼 수 있게 도와볼까 싶기도 하다. 아빠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얘기하면 수화기 너머의 아빠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생각해보자고, 재미있겠다고. 아빠가 빵 리뷰 유튜버라니. 긴장된 얼굴로 빵을 시식하고 진지한 평을 할 아빠를 상상해본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몹시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하얀 슈가 파우더, 적당히 끈덕진 크림과 촘촘함이 살아있는 보드라운 빵 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빠. 아빠에게라면 여전히 크림이 더 많은 빵을 빼앗겨도 괜찮을 것 같다.


2019.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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